나를 말한다..

신앙&인생

글보기
제목
나를 말한다..
조회수 36 추천수 0
2016-04-19 08:43:13
작성자 Level 10

 

지금, 이 글에 내용은, 현재 내가 한시간 50여분 짜리 글을 쓰는 중에 포함된 내용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통해서 나의 지난 일들과 집안얘기를 잠깐 얘기하려한다.
내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모든이들의 나에 대한 그릇된 억측들을 막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와 예수의 사랑만을 들어내기 위해서다.

대부분, 우리집에 속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고, 표출하고 있는 지적능력이. 마치, 부모님의 물질적 지원과 교육 지원을 통해 되어진거라 여기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참으로 우스운 것은, 그렇게도 성령충만 성령충만을 외쳐대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그런 생각과 말을 하고 있고, 내가 쓰는 글들을 보고, 내가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정작 눈앞에 나타나 있는 그 일이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이기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나 타인의 지원으로 되어진 일이라 여기면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고, 영광을 사람의 것으로 가로채려고 하는 이들을 본다. 해서 나는, 이 글을 통해, 그것을 바로 잡아놓으려 한다..

내가 쓴 글들을 여태 읽어왔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금 현재 전 세계에 어느 신학교에나 목회자들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에게서 나오는 죄의 원인과,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의 그 뜻을.. 예수의 사랑과, 그 와는 반대인, 사탄의 사랑을 통해서만 설명하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그 사실을 분명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는 이 모든것이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치부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인가 말이다.

산상수훈을 비롯해,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의 계명들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고, 고린도전서 2장에 말씀처럼, 사람의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던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 있는 예수의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고 터득 되어진 것인가.?
인간은 죄를 짓고, 가시적 죄는 뉘우치지만, 그 죄가 자애(自愛)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애(自愛),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이탈하고 벗어난 죄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죄를, 예수의 사랑으로 지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쓰는 글인데, 이것이 과연 사람에게서 나왔겠는가.?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 글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지는 얘기이다...
아니, 십 칠년 전, 딱 한사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나를 보여줬던, 그 사람한테는, 나의 어린 날들을 얘기해 주면서, 간략히 말해준적은 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다.

또한, 이 얘기는,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죄인된 나의  실체를, 들어내어 고백하고, 말하는 것이기에, 결코, 자랑 꺼리로 떠벌리는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길 바란다.

 

이 얘기는, 내가 낳은 자식들의 속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부모들처럼, 50년 가까이 같이 산, 한솥밥 먹던 식구들, 그 누구도 나를 모르고 있고,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 얘기이다.

한솥밥 먹던 식구들이 나를 모른다는 말은, 나의 어린날, 내 안에서 일어났던 영적 사건들과, 그로 인한, 내적 성장과 변화과정을 누구한테도 말을 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내게 일어났던 그 일들을 전혀 말을 하지 않게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그 시기에, 내 안에 있는 신앙적 기준(말씀)을 통해, 부모님의 그릇된 모습을 보게 됐고, 그것을 말하려 들면, 세상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 아우들의 교육을 좌지우지 하셨던 부모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배치되고 충돌하는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해, 어느 날부턴가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전혀 나타내질 않게 된 게 원인이다.

"니가 니 동생들 미래 책임질래?" 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모님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런 충돌이 일어날 때면, 하나님께서는, "니가 저들처럼, 저렇게 살지 않아서, 뭐가 바르고, 뭐가 잘 사는건지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라시며, 마음속, 울림과 함께 권면으로 위로를 주셨지만, 내겐 참으로 답답한 시기였다..

어머니는 지금 그 때를 많이 후회하고 계시지만,예수께 대한 신앙보다, 세상에서 잘먹고, 부하게 살기 위한 학과공부가 먼저이고, 그것에 방해 된다며, 교회에서 직책맏는 것을 반대하시고, 부서 행사에는 참여하지 말라 하던, 그런 부모님의 교육방법으로 인해, 동내 교회학교에서 회장, 부회장까지 했었고, 이 다음에 목회자가 되고 싶다 했던, 내 동생들은, 현재 신앙을 떠나서  예수를 등지고, 오히려 그와는 반대인 프리메이슨들의 그것을 따르고 살고 있다..

자아, 이것이 부모의 뜻데로 순존했던 내 동생들에 삶의 결과물이고 열매이다.
혹자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면 복이 주어진다"는 성경 구절을 들먹이며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저런 가치관의 교육과, 저런 순종이, 복은 커녕, 과연, 어떤 결과를 나을까. 결국 서로가 멸망에 이르는 길로 가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비록 어리고 세상에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 욕을 먹으면서 그게 아님을 수없이 말했다.  그런데 내게 돌아오는 말은, "니가 나를 가르치려 드냐?" 는 말이 전부였고, 그렇게 내 입을 막았던 분들이다.. 나는 그 때부터 말을 안했다.
어머니의 저런 가치관이 지금까지도 아무 변화가 없는 원인은, 1차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만 있던, 자식인 내 책임이고, 복복복 하면서, 복만을 받기 위해 예수 믿으라 했던 기복주의의 부산물인 순복음교회의 책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가지, 내가 내 속에 있는 그것들에 대해 말을 않게된 또다른 원인을 말하면,
내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영적 교만과 자고함을 막아주시고, 깊게 성장한 후에, 예수의 사랑으로만 입을 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직접 대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쓴 글들만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육체적 건강과, 풍부한 교육과, 부유한 물질적 환경속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부모와, 형제와, 이성과, 벗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다 받고 있는 사람이고, 그러하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거라 생각할 이들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내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죽을 죄를 많이 짓고, 예수님을 믿고, 은혜 속에서, 이런 글을 쓴다고 생각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아니다. 후자부터 말하면, 나의 죄의 8 90%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죄가 아니며, 내 삶의 육체적 조건이, 그런 죄들은 지을수 없는, 즉, 생후 8개월부터, 등받이와 팔걸이 같은거 없이는, 내 허리의 힘으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뇌성마비로 50년 가까이, 육체적 자유는 없이, 살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사회 복지 제도로, 나아 개인의 경제 생활이 그나마 조금은 나아졌지만, 67년생으로써, 가난으로 어려운, 당시에 집안 형편과, 아우들에게만 신경쓰실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깨이지 못한 의식과 당시 상황 때문에, 정규교육이라고는 유치원 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지금까지 혼자 독학만울 해왔으며, 그 독학마져도 교육교제가 아닌,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매달, 하루, 일 이백원씩, 내가 군것질 할 돈을 모아서, 아동 월간지를 사서 그걸 보며, 그걸 통해, 기본적인 인문상식과 과학상식, 그리고 세계사를 익혔던 것이 전부이다.

단 한번, 스물다섯살 때, 검정고시를 한번 보라는 복지관 직원의 권고로, 사회복지과 학생이 나와서 가르쳐주려 했지만, 내가 이미 아는걸 복습하는 과정밖에 안되기에, 가르칠게 마땅하지 않다며, 자원봉사이기에, 약 3개월동안 세사람이나 교체되면서 결국 흐지부지 된적은 있었지만, 누구한테도 교육에 관해서는 지원받은 적이 없고, 내가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 이상, 나 위해 잡지책 한권 사주지 않았던 분들이 우리 부모님이며, 또한, 부모와, 형제와, 이성과, 벗으로부터, 즉, 사람에게서는, 누구한테도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진정 나를 위하는 온전한 사랑은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작은 아이의 믿음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그런것들이 그리 증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또한 장남이라는 허울로 인해, 지금까지 양보만 하고 살았지, 단한번도 내가 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을 식구들한테 말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런 사실들을 얘기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분명코 내가 가지고 나타내고 있는 이 모든것은, 신학교나 교회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로, 분명코 하나님에게서 나온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의 교육으로 얻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영광을 내 부모나, 사람들에게 돌리려고 드는 이들이 있기에, 이것을 확실히 해놓기 위해서다.

어떤 이들은, 내 앞에서, 그런다.
"장애인 자식을 버리고, 죽이는 이들도 있는데, 같이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도 고맙지 않냐",고 말이다.
그것도, 장애인 특수목회 부서에서 일하는 목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 따위 소리가 나왔다.
순복음교회에서 내 홈페이지에 내 글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지만,

 

그러면, 부모에게 한번 물어봐라. "그 아이를 진정 사랑해서 데리고 산거냐, 아니면, 그 아이를 버리면 사람들의 이목과, 내가 벌받을까봐 무서워서, 의무와 책임으로 데리고 산거냐,"를 말이다.

아이를 위해, 진정 사랑했다면,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일하실 수 있도록, 또한 부모가 없어도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미래를 준비해줘야 한다.
그런데, 식구들 먹기 위해, 만든 음식에서 같이 먹이고, 외출을 안하기에, 재례시장에서 싸구려 옷이나 사서 몇년씩 입히고,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장애인 보험 하나 들어놓지도 않았으면서, "나 없으면 어쩌냐"는 소리나 해서 아이에게 좌절감만 느끼게 해주고, 그 장애아 때문에, 내 인생 쪽났다며, 자기 고생하는 것만 알아달라는 부모들.. 이게 그 현실이다.

여기에, 나에 대한 얘기를 보태면, 우리 부모님, 내  나이 서른여섯살 때까지, 내 양육비로 쓴 돈의 총액은, 700만원 정도이다. 1년에 700만원이 아니라, 36년동안 700만원이다.
그 중에서도, 200만원이 넘는 컴퓨터 교체비와, 300만원 가까이 되는 중추신경 수술비는, 누군가에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엄밀하게 따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 있는, 전세 3500만원도, 부모님이 벌어놓으신 돈이 아니다. 내 나이 스물여덟살 때, 일반 자가주택이지만, 산동내에서 밖에 나아가 보지도 못하고, 교회 한번 나가기도 힘든 환경에 살고 있는 나로 인해서,내 재능이 아깝다며, 내가 제대로 활동을 하려면,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한다며, 후원인들을 통해 모은 돈을 보내준 분들이 있었기에, 그 돈을 보태서, 상계 1단지로 전세를 얻어서 이사갔던게 우리가 처음 아파트 생활을 하게된 시작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집이 아파트생활의 시작은, 나로 인해서 했지만, 그 와중에, 건축일을 하셨던 아버지와, 한복 싹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가 같이 모아 놓으셨던 돈과, 할어버지가 남기신 10억도 안되는 재산을, 형제 우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 작은아버지들과, 친 고모들로 인해서, 의붓 할머니가 50% 가져가고, 장남이신 아버지를 비롯, 총 7남매가 나머지를 가지고, 똑같이 나누어 갖게 된, 약 7천만원 정도 되는 돈은,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 사업자금과 카드대금 으로 지출 되었고, 몇년 후, 동생 결혼 문제로, 어엿한 집한채 없으면 결혼시키기 힘들겠다는 이유로, 대출을 받아서 남양주에 한일 아파트를 사서 이사가게 됐다.

동생이 결혼하고 일년도 안되서, 남양주에 집을 1억을 받고 팔아서 대출빚 갚고, 동생 자동차 할부비 갚아주고, 사업 자금으로 조금씩 떼어주고, 다시 대출을 받아서 인천에 빌라로 이사를 갔다. 우리집은 밑에, 반지하층이 있는, 1층이었는데, 휠체어를 타야하는 나는, 계단 때문에  마음데로 밖에 나아가 보지도 못하고 거기서 십년을 살게 됐고, 그렇게 살다가  6500만원에 그 집 팔아서 나머지 대출비 갚고, 남은 돈 4천 갖고, 다시 상계동에 전세로 와서, 서울 거주 1년반이 지나서, 겨우 재개발 임대 아파트를 임대 받아서 전세로 돌려 살고 있는게 지금이다..

그러면 지금, 명목상 내 몫이라고 이름 지어진 전세 3500만원은, 부모님이 나에게 남겨준 재산인가.?
결국, 스물여덟살 때, 나로 인해 받았던 후원금이란 계산이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 "나는 쟤한테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고 하시는 이유이다. 그런데, 전후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내 속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고, 반듯한 나를 보며, 어머니의 저 말씀을, 그져 겸손, 또는 어머니의 한없는 희생에서 나온 말로 돌리려 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단호하게 말하지만, 내가 사람들 앞에, 내가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어주려 하고, 반듯하고 옳은 삶을 살려고 나타내고 있는, 나의 이 모든 사람됨의 모습들과, 신앙적 가치 기준에 대한 시각들은, 결코 부모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고, 예수의 무자애의 사랑을 말할만한 그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쳐서 되어진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오로지, 열두살 때, 배움에 대한 부러움으로 꽉 들어차 있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나의 높고, 지고한 그것을, 직접 가르칠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주시며, 저런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나의 사고와 의식이 비틀어지지 않토록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 오신분이 오직 하나님이시란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분노하고 화가 나는 이유는, 사실이 저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도 지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을뿐이고, 그 과정을 통해, 내게 말하게 하시고, 쓰게 하시는 글이, 예수의 사랑인데, 하나님의 일은 보지 않고, "너는 어떤 놈이냐." 하며, 뒤에서 남의 감정이나 건드려 시험이나 해보고, 나를 알지도 못하는 주변인들을 통해, 뒷조사나 하고, 그렇게 편협함으로 얻어낸 헛튼 정보로, 내가 자기들 기준에 안맞는 태도로 대항하는듯 보이면, 하나님의 역사 마져도 헛것으로 치부하려 들고, 그러한 역사를  보고 들어도 사람에 의한 것이라며, 하나님께 돌려야 될 영광을 사람의 것이라 치부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저런이들 때문에, 내가 집안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런 과거에 일들을 말하는 것이, 내 부모와 형제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 모두 잘못 판단했다.. 내가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 모든것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 말을 했었다면, 심근경색과 심장판막증이 있으신 우리 어머니, 80세가 넘게 살아계실수가 없었을 것이고, 절대 나와는 같이 못 사신다. 자식에게 날마다 불평과 원망하는 소리를 듣는데, 어떻게 같이 사실수 있겠는가.. 내 동생들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나는 뒷전으로 놔두고, 자기들한테 얼만큼 최선을 다해,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알텐데, 내가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늘어놓는다면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 그럼 한번 생각해보자.. 세상적 가치관과 기준으로 정상이라 부르는 사고와 의식을 가진 사람이 ,평생 누구한테도 제대로 된 사랑한번 받지 못하고, 저런 불평등의 환경과 상황속에서, 저러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왔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감정과 의식이 생길 것인가를 말이다..
결과는 자명하다.. 그 결과의 부산물은, "불만"과, "불평"과, "원망"이 전부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부산물들이, 실질적인 내 삶속에서는 여태껏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왔다..
이 말은, 속된 말로, 내가 무슨, 도를 터득해서, 그런 의식과 감정들을 느끼지  않았기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나 또한 타락한 세상이 정상적 사고라 말하는, 모든 서운함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미움과, 배반감과, 부러움의 감정과 의식을, 다 느끼고 있는, 고로, 나도 타락한 인간들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내가 예수를 알기 열두살 전에는, 누가 강요해서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장남의 책임이라는 빛 좋은 허울 때문에, 맏형으로써 동생들에게 양보하는게, 착해보여서, 그런것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고,

내가 예수를 알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내가 받지 못한, 불평등의 권리로 인해, 내 안에 생겨서,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저 모든 의식들과 감정들이 생기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주시기 위해, 내가 갖지 못한것들에 대해, 모든 의미와, 바라보는 시각을 잘못되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나에게 형성되도록 도와주셨기에 내게서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열두살 때부터, 스물네살 때까지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스물네살때부터는, 나의 이런 삶의 태도를 더욱 확고하게 구체화 시킬 수 있도록,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무자애의 그 사랑을 기준으로, 40일간의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해, 체계적 개념정리를 하도록 도우셨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닮아서,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 창조된 나의 마땅한 사람된 본질임을 깨닫게 하셨고,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내게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저들이 소유하게 된 그릇된 모습들이나, 부정적 손해를 입은 부분들은, 저들의 잘못이거나 저들의 책임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에서 이탈하고, 자애(自愛)를 하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저들에게 사랑하도록 도와주지 못한, 나의 잘못이고, 나의 책임들임을 알게하셔서, 저들의 대한 더 큰 죄스러움과 미안함만 있을 뿐, 그 때부터 지금까지는,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기에, 결코 내가 받았던 불평등한 대우로 인해, 식구들 앞에 어떤 말도 하지않는 이유이다.

지금, 나는, 누군가 신학을 해서 교육 목회를 하라느니, 또 사회복지학을 전공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내게 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해주고 있다.

"지금 나를 통해, 나오고 있는 이러한 모든 것들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예수의 사랑을, 여러분들 마음에 느끼고 보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은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여기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지식과 경험 같은게 더해진다면, 하나님의 일에, 방해와 독으로 작용할 것이 자명할 것이고, 인간의 것인냥 왜곡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은 축소될 수 있기에, 그래서 나는 내 부족을 인간의 방법과 힘으로는 채우지 않겠다" ,라고 말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내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한, 긍정적 의식이나 사고로 발생 되어진 결과이거나, 사랑을 받지 못한것에 대한, 역 작용으로 발생 되어진 결과로, 예수의 사랑을 발견하거나 찾아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통해 사람들의 그것이 사랑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고, 그 두가지를 놓고, 비교하며, 말하고, 쓰고있는 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이다.

그렇다. 사람에게서는, 그것도 가족에게서는 제대로 된 사랑한번 못받았고, 평등한 권리도 없는것이 당연한 취급으로 여기고, 대우를 받고 있는 존재가 나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똑같다.
나의 이 얘기를 듣는, 자기 스스로 믿음이 충만하다 여기는 이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할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너 같은 장애인은,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으니, 천국만 바라봐야 한다는거다",라고 말이다.
허나, 그런 말과 생각 자체가 천국에서 배척받게 될, 불평등을 조장하는 거짓 믿음임을 알아야 한다.

자아, 그렇다면, 그렇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데도 사랑을 얘기하고 있고, 더욱이 예수의 사랑을 이렇게 깊게 말할 수 있다면, 나를 사랑하신다는,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거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아니, 결코 아니다. 열두살때부터 37년을 이어온 신앙생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흔히 은사주의자 들이 말하고 갈구하는,  눈으로 보이는 그런 기적은 단 한번도 보여주신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삶 자체가 기적이고, 전혀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 중지와 약지만으로 이런 글을 논리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시는 성령의 역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기적은 그리 필요하지 않다. 세상에 각종 경험과 각종 교육으로 머릿속에 꽉 들어차있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는 말씀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만 열두살이 되던 1979년 2월에, 한집에 같이 세 살던 사람에 의한 전도로,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됐고, 그 해 가을에, 찬송가 표지에 적혀 있던 십계명을 읽고, 어느날 기도하며  그것을 생각하는 중에, "이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당연히 지킬것이고,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릇된 일은 안할것이기에,십계명은 사랑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건 그 때이지만,생활고로 힘드셨던 부모님으로 인해, 스물네살때까지 주일예배 한번, 철야예배 한번, 기도원 한번.. 이렇게 교회 행사에 참석한건 모두 다 해서 다섯번도 안된다.

번영신학과, 은사주의와, 기복신앙의 모태인, 순복음교회에서 나온 모든 설교나, 구역공과나, 그 어떤 교제에도, 십계명의 저런 사실을 언급한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이것을 교회에서 가르첬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깨달음이 어디서 왔겠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과 성령이다.

내가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육체의 죄를 지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 하다.
그렇다, 나의 삶의 조건으로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런 삶의 조건으로 죄를 지을수 없기에,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죄가 없고, 의롭다고 떠벌리고, 천국은 맡아놨다며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내가 중증 장애인으로써 죄를 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해서, 내가 의롭고 죄인이 아닌가..
아니 절대로, 결코 그렇지 않다. 육체로 나타난 가시적 죄는 죄의 부산물들일뿐 진짜 죄가 아니요,
그 죄들은, 나 자신을 위한,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원인이기에, 실체적인 진짜 죄는 내 속에 있는 자애(自愛)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애(自愛)가 없다면, 저런 죄의 부산물들은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진짜 온전한 이타주도적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기에 불가능하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단 한번도 받지 못했다해서, 진짜 참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짜 온전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세상과 인간이 아니다. 세상과 인간의 그것은 겉 모양만 흉내 낸 모조품에 불과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어떤 신비적이고 가시적인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해서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예수의 사랑을 이렇게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랑을 하게 하신것, 그것이 내게 주신 사랑이다. 진짜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으로 하여금 또 다른 대상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의 사랑에 대한, 내가 쓰는 이런 글들은, 어떻게 나오고 있는 것인가.?
나는, 열여섯살 때부터, 성결에 대한 강박증과 죄 의식에 눌려서, 스물네 살 때까지, 극도의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다. 왜냐면, 십계명과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비춰진, 내 속에 실체는 그 말씀의 기준과는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만 열두살부터, 열여섯 전까지, 약 3년 넘게, 비록 같은 패턴의 기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침,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서, 두시간씩 하루 여섯시간을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중에, 어느날 아침부터,  전에는 내 속에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밝은 의식을 느끼게 됐었고, 지고하고 높은 이상을 내 속에서 느끼개 됐었다.

약 4년간 그 사이에 내게 비추었던 하나님의 그 빛은 지고하고 높은 이상이었고, 하나님과의 절대적 기쁨의 관계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준 빛이었다. 그 때가, 내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소통하는 시기였고,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고 섬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 빛이 나를 비추고 있던 그 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느낌 그대로, 지금도 표현한다면,
"절대적 기쁨의 관계"이다...
어떠한, 걸림이나 마찰, 숨김이나 가려진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관계...

그런데,
그 빛과 이상은, 흔히 은사주의자들이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말하는, 환상이나, 환청이나, 방언이나, 꿈과 같은 성령의 은사로 간주하는 어떠한 외부적인 신비적 체험도 없이.. 그러한 내 속에서 너무나도 조용하게 물이 스며들 듯이 내 안에 임했기에... 참으로 어리석게도, 나는, 그 밝고, 맑고, 환한, 그 빛과, 높고 지고한 이상이.. 내가 나이가 먹어서 성장 과정으로, 머리가 커져서, 나 스스로 의식이 커가고, 깨어나고, 그래서 저절로 생겨나 얻어진, 내 것이란 착각 속에 빠지게 됐었다.

그로 인해, 나는 베드로와 같이,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내 자신에 대해 믿는 헛튼 믿음의 의식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송구스럽게도 그 때.. 내 마음에, 이런 생각과 의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없고, 나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라는, 이따위 더러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착각과 맞물려서, 그 당시 내게는 성결에 대한 강박 의식이 생겼었다.

 

그 강박증의 시작은 이것이었다.
TV를 볼때, 여자가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남자가 나올때까지, 브라운관 한쪽구석을 처다보고 있다가 남자가 나오면, 얼굴을 돌려 예수님의 초상화를 처다보는 버릇이 생겼었고, 그 과정이 반복되는 중에 내 눈길이 초상화의 눈과 단번에 맞춰지지 않고. 다른 부위에 눈 길이 맞춰진 경우가 많았다.
내 눈길과 초상화의 눈과 맞춰지지 않으면, 맞춰질 때까지 계속 그 과정을 반복 했다.
내가 만약, 그때 장애가 없고, 보통 아이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온 아이였다면, 다른데 관심을 두어서, 그러한 버릇과 의식에서 바로 벗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얽메이게 됐었다.

그런데, 사탄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나를 시험한건지.. 그게 아니면, 나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인지.. 하나님은 그런 착각으로 교만에 빠져있던 나를, 가만두지 않으셨다.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내 의지로는 막을 수 없는, 내 생각속에 들어오는 연상들을 통해,  내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내 죄들을 보게 하셨고, 그로 인해 8년이란 시간을 극도의 고통속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내 속에 들어오고 있고, 떠오르고 있는 그 죄들의 연상을 내 것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고, 인정하기 싫었다.
"하나님께 대한 내 믿음은 이것인데, 왜 저런 연상이 내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저의 마음 아시지 않습니까. 저건 내 것이 아닙니다."라면서 말이다.
왜냐면, 내 속에는 분명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절대적 기쁨의 관계'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쓴 시에서 표현했던,
"나아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을 만큼, 커다란 아픔이, 내게 다가와 있을 때", 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몇년이 지속되면서, 결국, 내 것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내 속에 있는 그것들이 분명코 내 죄들임을 알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하고싶은데, 눈물콧물 흐리며 울부짖으며 하는 회개만 회개인줄 알았던 당시 내 생각으로는 주위 여건이 맞지 않았다.

이 말은, 속으로 아무도 들리지 않게하는 기도는 눈을 뜬채로도 얼마든 할 수 있지만, 지금도 독방은 아니지만, 셋집 단칸방에 식구들과 같이 지내야 하는 당시엔, 나 홀로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죄로 인한 고통은 커져만 갔고, 끝에 가서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서 지옥에 있는 느낌을 느꼈었다. 그 느낌으로 인해, 내 육체에 나타난 현상은, 시아가 쫍아지고, 먹을수가 없고, 몸이 마르고, 웃음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고, 우울증이 생겼다..

이 얘기를, 시간이 지나고, 약 17년전에, 딱 한사람한테는 요약해서 한적이 있지만, 이러한 얘기들을 당시에 내 주변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줄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설사, 듣는다 해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이 없기에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방법이 없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수십번을 회개의 영을 주시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주시지 않았고..
스물네살이 된 봄의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내게 다가오게 하셨던,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나의 기도를 달라지게 하셨다..


그 기도는..
"아버지, 제가.. 저들과 같이 저렇게 깨뜻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제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제가 저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제게 회개의 영을 주세요..".. 라는 기도였다..

그 때부터, 내 안에서 성령이 성경을 통해, 조용히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열두살 때 주셨던 십계명의 뜻에 대한 깨달음을 다시 상기시키시며,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의 이유와, 그것을 통해, 내 모든 죄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 기준으로 내 죄를 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 기준은, 선과 악도 아니고, 의이와 불의도 아니였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무자애의 진짜 참사랑과, 사탄의 자애의 거짓 사랑이였다.
모든 선과 악, 그리고 의이와 불의는, 바로 이 서로 다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이 두가지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회개의 목적을 바르게 정하고 구했을 때, 성령이 내 안에서 회개를 도우셨고, 내 모든 죄를 보게하셨다.

나의 모든 죄들은,
(1) "상대를 위해 상대를 사랑하지 않은 죄"이며,
(2) "사랑하도록 도와주지 않은 죄"이며,
(3) "나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척 했던 죄"이며,
(4) "나라는 존재로 인해, 상대가 지은 죄에 대한 죄"이며,
(5) "장애라는 조건의 틀과, 관념과 생각속에만 가둬놓고 상대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은 죄"이며,

그 모든 죄는, 나를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에, 나를 사랑한 죄이었다.

나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 기준으로 나의 죄들을 보게하셨고, 회개를 하도록 하셨다.

이 회개는 결코, 죄의 결과적 부산물에 대한 회개만이 아니었고, 무서워 떨면서 두려움 속에서 했던 회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의 그 사랑의 진리를 통해, 내 죄들을 보게 하시며, 평안과 안도와 기쁨과 감사로 이끄시며, 40일간 두번의 회개를 하도록 도우셨다. 또한 이것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보게 하셨다.

내가 나의 지난 일들을 말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내가 육체적인 죄는 짓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꺼리로 떠벌리기 위함도 아니고, 내가 얼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를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다.
결코, 모든 죄의 진짜 실체는,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 부산물들이 아니며, 나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거짓 사랑, 곧, 모든 죄들의 실체는 자애(自愛)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저 8년이라는 시간과 그로 인한 회개를 통해, 내가 내 것이라 주장하며, 내 의이라고, 하나님 앞에 내세웠던, 또 한가지 의식을 바꾸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발생자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당신께 대한 내 믿음은 이것인데  저 더러운 연상이 왜 내게 떠오르는 겁니까." 라며, 내가 따지듯 물었던, 바로, 그 생각 말이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하는 중에, 이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8년전까지 너에게 있었던 지고하고 높은 빛의 이상은, 니가 나이 들고, 머리가 커지고 의식이 깨어서 너에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가 니 속에서 나의 빛의 이상을 보고 느끼게 했다. 또한, 내가 나의 빛을 너에게 비추어 주었기에, 너에게 그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
그러면, 너의 그 믿음은 누구로 인해 나온 것이냐. 내가 말씀을 통해 너에게 발생되게 한 것이다. 니가 할 일은, 내가 너에게 준 그것을 선택하고 지켜가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또 한가지 깨닫고, 다시 고백하고 있다.
그 때.. 내것이라고 하나님앞에 떠벌리고 내세웠던 그 믿음으로 내 의라고 주장했던 그 믿음은 결코 예수님을 믿는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논리화와 신념화 된 가짜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믿음을 통한 구원은, 각각 다른 모양과 방법과 크기로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라 말하고, 예수의 믿음을 말했던, 사도바울의 말 그대로 말이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나타난 믿음에 대한 의지적 수동태는, 바로 이 선물에 관한 의지적 수동태이다.
내가 스스로 발생시켜 소유한 것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의 믿음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 믿음을 내 의지로 선택해서 내 의지의 삶으로 예수를 닮아가며 지켜가는 것이 믿음이다.

지난날, 내게만 허락하셨던, 이러한 회개의 모습과 방법을 통해, 내게 말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러한 글들이다. 왜냐면,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회복하고, 그 분과 같은 거룩을 이루는 길로 가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 의식에 잡혀 있고, 그 죄들과 싸우고 있다. 내가 이 육체를 벗어나지 않는 한 나 자신을 위한, 저어 자애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회계의 목적을, "사랑하기 위함"으로 정해서 회개의 영을 구했을 때, 성령이 회개의 영으로 역사하셨듯이, 내가 쓰는 이런 글 자체도, 내가 사랑을 느끼고, 그 대상을 위한 사랑이 목적이 됐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 커지므로 나오는 글들이란 사실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