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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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
Level 10   조회수 234
2016-01-14 02:45:12


  

 

**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

[이 글은, 2013년에 내 홈페이지에 써놓은 원문을 수정과 추가하며 녹음한 내용이다.]

 

대부분 신앙을 말하는 목회자들은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또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의 대속의 사건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옳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타락으로 인해, 자애(自愛)의 거짓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으로 인해, 참과 진리이신, 하나님 예수께서 자신의 참과, 진리와, 의이를 버리고, 부인하고, 사람이 되어 죽으신 사건, 그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 사건 자체만을 의미를 두고 그것만 강조하고 믿으라하기에 삶과 생각과 의식에 아무 변화도 거듭남도 없이 아무렇게나 삶을 살아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사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그 대속의 사건 자체를 믿는 것을 믿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사건 자체는 마귀들도 믿고 떨기 때문이다.
하나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 대속의 사건을 선택하신 그 사랑을 믿어야 하지. 사건 자체만을 믿으려 해서는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 단독으로 이루신 은혜의 역사이며 사건이고, 우리 각 개인은, 그 사건과 역사를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또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믿는 것,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며, 고백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래야 그 안에서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바로 나를 향하신 사랑으로 말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에 대해 말할 때, 긍정이란 포장으로 덧씌우려 한다.
어떤 일이든 내 뜻과 소원대로 되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내 뜻과 소원대로 안 되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치부하려 든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쪽에서 볼 때만 긍정이지.. 하나님 쪽에서 보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부정적 행위이며, 죄악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의식이, 칸트식 신학인 "요청하는 신앙으로서의 모시는 하나님" 이란 말도 안 되는 철학을 낳게 하는 것이다.
즉, 내게 필요 할 때는 모시고, 내게 필요 없을 때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분으로 만들고, 그러다 내게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믿음... 과연 이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는가...
 
글을 더 써 내려가기 전에, 요한1서 3장에 이 말씀을 적어 놓겠다.

[한글 킹제임스성경, 요한1서 3장, 9절~24절..]
(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함이요, 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
(10)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
(12)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뇨?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13) 나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16)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노니, 이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음이라.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도다.
(17) 누가 세상의 재물을 가졌는데 자기 형제의 궁핍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겠느뇨?
(18)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리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 또 그 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고히 하리라.
(20) 이는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은 그 분 안에 거하고 그 분은 그 사람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아느니라.

 

사도요한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를 뭐라 말하고 있는가..

 

13절~14절을 주목하라..
문맥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왜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우리를 미워하는가.? 그것은 세상이 다 하는 사탄의 사랑 자애(自愛)가 아닌, 상대만을 위하는 무자애(無自愛)의 예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예수의 사랑으로 인해 세상에 사랑이 가짜요 거짓이란 사실이 들어나기에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말이다. 또한 예수의 그 사랑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그것으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설명했던 마태복음 5장의 8복에 대한 설명과 같은 맥락임을 유의하자.]

 

사도요한은 명확하게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안에 거하느니라."..
즉, 이 말은, 예수의 그 무자애(無自愛)의 사랑이 아닌, 세상에 사탄의 사랑, 곧 자애(自愛)는 사망이다 이 말이다.

세상에도 사랑이 있다. 아니, 사랑이라 불리우는 감정과, 방법과, 대상과, 상황에 따르는 기타 여러 모양의 행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저 감정과, 방법과, 대상과, 상황에 따르는 행위의 사랑..
도대체 이 모든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대답은, 우리 속에 양심이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을 위한것 뿐"이라고 말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세상에 사랑은, 내 마음과 내 기준에 맞는 대상을 골라서, 내 상황과 내 입장과 내 조건에 맞춰질 때, 비로서 감정과 행위가 나오는 사랑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저 사람도 좋아하겠지 라며, 자기가 원하는 방법과 자기가 좋아하는 행위와, 내 감정으로 행해진다.
한마디로, 내가 만족하기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그것이 세상에 사랑이다.

세상에 사랑이 그렇다는 증거가 바로 성경에 있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2절~3절..]
(2)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3)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세상의 사랑은 말한다. 내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면 사랑이고, 내 것을 모두 주면 더 큰 사랑이다. 라고 말이다.
허나, 위에 말씀에는 세상에 사랑을 향해 혀를 찌른다.. 너희들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또 비록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왜.. 왜 어째서 저것을 사랑이 아니라 말 하는가.

 

자아, 여기서, 세상에 사랑의 이유를 보자..

 

첫째. 내가 복 받기 위해, 또 천국가기 위해, 상급을 계산속으로 깔아놓고 주려 한다.
둘째. 내가 받은 만큼 주지않으면, 벌 받지 않을까 두려워서 주려 한다.
세째. 내가 가진 사회규범적 약속과 지휘적 채면때문에 도의적 책임으로 주려 한다.
네째. 내 주변의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 또는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주려 한다.
다섯째. 내가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 투자하겠다는 생각으로 주려 한다.
여섯째. 내가 가진 이상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 이상을 만족 시키기 위해 주려 한다.
일곱째. 내 주변의 다른 사람이 주니까 내 자리를 지키고 그와 편승하기 위해 주려 한다.
여덟째. 상대가 힘들면 그 여파가 내게 미치기에 어쩔 수 없이 상부상조로 주려 한다.
아홉째. 내가 소유한 도덕성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평안과 안도와 도덕적향락주의자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주려 한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위에 말씀에서 지적한 세상의 사랑이다.
즉, 이런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 말이다.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내게 말하게 하신 예수의 사랑은, 저런 자신을 위한, 상황과 조건과 방법론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동기와, 의도와, 목적이다.. 즉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으로 사랑이냐 아니냐로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그렇다.. 내 상황, 내 조건, 내 입장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그에게 맞춰진 사랑이 예수의 사랑이다. 또한 그 사랑으로 똑같이 나도 맞춰주는 사랑이다.

예수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은, 상대에게 내가 좋아하는걸 주지 않는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면, 상대의 가슴을 헤아려줄 수 있는 예수의 그 마음과 눈이 내게 주어졌기에, 상대에게 가장 좋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 수 있기에, 그것을 하나님께 찾고, 간구하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사랑은, '선'이란 대명사와 '공의' 라는 대명사의 동외어(同外語)이다.
즉,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저 세 단어는 같은 것이다.
왜냐면, 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선'도, '공의'도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가지를 분리해서 말하려 든다. 허나, 이 세가지는 절대 분리 될 수 없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분명히 말한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계명.. 곧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의 기준이며, 동시에 '공의'의 기준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내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상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곧 상대를 위한 사랑으로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 가기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으로 선과 공의를 행하지 말라..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천국문 앞에서 예수님께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말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의 그 모든 행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소자에게 해준것이 곧 나에게 한것이라 하신 비유를 보라. 칭찬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적 미래 예측을 하고 행하였는가. 절대 아니다.

 

인간 타락의 원인체요. 타락의 본성인 자애(自涯)의 근원인 사탄은, 저 모든것을 통해서 인간의 타락의 본성인 자애를 만족 시켜주려 한다..

바로 그것이, 한쪽에는, '니가 천국 가려면 믿기만 하라'이고, 다른 한쪽에는, '니가 천국 가려면 행하라',라는 속삭임이다. 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너를 위해서 하라",는 말이다. 사탄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과, 모든 사상에 저변에 깔려 있는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한마디로, 저 속임수에는, 저 거짓 믿음과, 저 거짓 행위에는, 예수가 없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만 하면, 천국 가는가?..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인가?.. 이 또한 다시 물어야 한다..
 
명심하라..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내 뜻과 소원대로 이루어질 보이지 않는 실상만을 의미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사건 자체를 믿는 믿음이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또한 아니다.

그 사건을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으로 믿고, 그 사랑의 믿음을 기준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래야.. 내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듯이, 반대로 주시지 않는 것도 나를 향한 사랑이라 믿는 그것, 그것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랑의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우리를 위해 주신 저 계명을 지켜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안에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가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바로 그 사랑의 믿음을 통해. 사도바울의 이 권면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범사에 감사하라"..는 권면이다..
 
몇 주 전 부터, 네이버검색을 통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문장으로 접속하는 사람이 있다.
이 홈페이지에 어느 회원이 써놓은 글의 제목이기에 그 글 때문에 생긴 링크로 접속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 검색 링크를 따라 네이버에 들어가봤다.. 쭉 흝어 보니... 저 문장은 톨스토이가 쓴 단편집 제목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검색으로 책의 요약을 보니..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가 책의 핵심주제임을 알게 되었다.
 
헌데, 내 노파심일지 모르지만, "니가 저 책을 보고 사랑에 대한 이런 글을 쓰는거 아니냐?"..는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저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쓴 저 책에서 말한다는 사랑은 예수의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반 예수적 사랑이다. 톨스토이는 저 책에서 인간안에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게 인간이라 말한다고..
 
그러나 예수께서 내게 말하게 하시는 사랑은 저 책에는 없다..
나는 인간에겐 진짜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타락한 인간이 가진 사랑은 자기자신만을 위한 거짓과 가짜인 자애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이신 하나님이신 예수가 같이 하셔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쓰게 하시는 글의 핵심이다..
 
즉 저 책에는 예수가 없다. 다시 말해 저 책은 가짜 사랑을 말한다.
내가 저 책을 보고 이런 글을 쓴다면, 자기 중심적인 자애와 인간애만 있을 쁜,
예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제발, 내 글을 통해 나를 보지말고 예수를 보라.. 그래야 사랑이 사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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