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씀..]
[마태복음 5장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11절~20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한글 킹제임스 성경, 마태복음 6장 16절~34절..] 또 너희가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것을 보이려고, 그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그리하여, 네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히 계시는, 네 아버지께만 보이게 하라.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치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도둑질하느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치지도 않으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몸의 빛은 눈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순전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요.. 만일,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도 어두움으로 가득 찰 것이라..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곡물창고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들이,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 가운데,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를 한 큐빗이나, 더 늘릴 수 있겠느냐.. 또, 어찌하여, 너희는, 의복에 대해서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유의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며,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영광을 누릴 때의 솔로몬도, 이 들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 분께서 너희를, 더욱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이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 오늘은.. 예수의 사랑인, 요한복음 13장 34절의 새계명으로, 다시 묵상하는 산상수훈, 팔복의 여덟번째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에 대해, 묵상하려 한다. 우리는 일곱번에 걸친, 지난 글을 통해서, 마태복음 5장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 요한복음 13장 34절의 예수님의 새계명으로, 일반적 해석과는 다른, 시각과 해석으로, '마태복음 5장 3절~9절' 까지의 복의 뜻과, 의미를 묵상해 왔고, 이제 팔복의 마지막(?)이자, 예수의 제자로써,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과 방법을 말씀 하시기 위한, 천국 소유의 시작과, 과정의 결론인, 마태복음 5장 10절, 의이를 위하여 박해와 핍박을 받은 자의 복에 까지 이르렀다. 지난 글들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산상수훈은, 하나님께 어찌하라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제자로써, 내가 만나고, 대해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하라는, 사람을 위한 사람수훈이기에,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제시하신, 각각의 복의 조건사안들은, 저 말씀을 듣는, 한 개인의, 현 상황이거나, 처지를 소유한 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그들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이러한 조건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라는 의미로 봐야,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도 어우러질 뿐더러, 저 여덟개의 구절은, 각각 동떨어진 독립된 구절이 아니라, 상호 서로 이어받는 구절로써, 우리를 위해, 완성하신, 예수의 사랑(요 13:34-새계명)이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설명의 서두며, 동시에 결론이요. 팔복에서 제시하신, 저 조건사안들은, 바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과, 그의 형상으로, 타락 이전의 모습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며, 제자됨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묵상해왔다.. 다시 말해, 저 여덟개의 각 구절의 귀결 부분인..
"천국을 소유, / 위로를 받음, / 땅을 얻음, / 배부름, / 긍휼을 입음, / 하나님을 봄, / 하나님 아들로 불리움.."
이것들 자체는, 저런 삶을 사는 이에게, 따라와 주어지는 필연적 결과이지, 결코, 목적이거나, 한사람 개인에게 주어지는 복이라 해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여덟 구절의 귀결점은,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현재, 우리들이 보편적 의식으로 갖고 있는, 복에 대한, 기준과 관념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즉, 저 귀결점을 소유한 사람이 복의 사람이라고 여기는것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복에 대한, 기준과, 관념과, 개념을, 완전히 뒤집으신다... 저 팔복의 조건을,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 요한복음 13장 34절의 예수의 계명, 곧, 예수의 사랑을 통해, 다시 재해석 해서 바라봐야 할 이유는, 저 팔복만을 따로 봤을 경우, 기존 해석으로 풀이 해볼 수도 있지만, 그리 할 경우,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는 맥이 끊어져 버리고, 전혀 무관한 구절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는 짓이기에, 올바른 관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면, 그들도, 사람이기에, 이전에 인간으로써, 가난과, 슬픔과, 낮아짐과, 주림 또 목마름과, 긍휼에 대한 바램을, 이미 느끼고, 경험하고, 소유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를 위한 예수의 사랑이, 내 모든것에 충족이 되어서, 복이 되어 주셨기에, 인생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화됨을 통해, 이 모든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지고, 복을 누리는 상태이므로, 더이상 자신이 누리기 위한, 복의 조건을, 소유할 필요도 만들 필요도 없다 이 말이다.... 만약, 목회자이든, 교회직분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가 아직도 저런것을, 계속 구하고, 저기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와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만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예수가 누구신지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이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아닌,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고, 이용해서, 속된 말로, 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러 따라다니는, 들 고양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저 팔복의 조건은 현재 내가 처한 삶의 상황과 처지를 말하는게 아니라, 아래와 같이, 다른이들에게, 이러한 복의 사람이, 되어주라는 뜻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에 복, 애통하는 자에 복, 온유한 자에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복, 긍휼히 여기는 자에 복, 마음이 청결한 자에 복, 화평케 하는 자에 복, 의이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에 복 ..
예수님은, 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저 여덟개의 각 구절들을 아주 치밀하게 연계시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첫번째. 3절,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 주어라..
자기를 부인하므로 마음을 비워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목적과 이유는, 자아애(自愛)가 없는 진짜 사랑이신 예수가 내안에 임하셔서, 저들을 위해 저들을, 내게 사랑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함이며, 다른이들의 마음과, 입장과, 생각과, 처지와, 사정을, 내안에 계신 예수의 가슴으로, 헤아려 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함이며, 이것이 곧 예수의 제자로써,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면, 자아애(自愛)가 없는, 예수의 사랑의 그 가슴만이, 다른 이의 마음과, 의식과, 생각을, 내안에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4절, 그렇게 예수가 내안에 계시면, 다른이의 고통과, 힘겨움을, 내 몸에 한부분으로, 함께 애통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오감과 경험과 지식과 판단으로는 다른이의 아픔과 힘겨움을 결코 알 수 없지만, 오직 부인되어져 비워진 내 속에, 자애(自愛)가 없으신, 예수가 함께 하시므로, 자기를 온전히 버리신, 예수의 저이를 위한 그 사랑의 가슴으로.. 울고 있는 그를 위해, 그의 가슴이 되어 같이 울어 주고, 아파하는 그가 되어, 어루만져 주고, 힘겨워하는 그가 되어, 그의 짐을 같이 져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5절, 그렇게 하려면, 그의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할 목적과 이유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멀리 서서, 동정의 눈물이나 흘리는 것이, 상대의 아픔과 힘겨움을 헤아려 주고, 느끼고, 알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라 생각하거나, 거기서 끝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의 삶속으로 낮아져 들어가서 그와 같은 동질성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럴때만이 그의 아픔과 고통과 힘겨움을 헤아리고 느끼고 함께 애통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고, 느끼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나는 그와 같은 자리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 예수가 나를 위해, 그리 하시려고 온유한자가 되셨듯이 말이다.. 네번째. 6절, 그럴때만이, 그를 위한, 아름답고, 옳은 길을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진정 상대를 위한다면, 결코 상대에게 무조건 내어주지 않는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물어서 찾아 보고, 상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려하되, 무엇이, 또, 어떤 방법이..그를 위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은 사랑인지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한다. 이것이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신 이유이다.
다섯번째. 7절, 그리되면, 그에게도 사랑과 의를 이루도록 해주려고, 창자가 들끓는 고통의 긍휼을 소유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것이다..
예수의 사랑안에 있는 제자라면, 상대를 위해, 가장 아름답고 좋은 사랑을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다가 깨닫게 된다. 그의 아픔과 고통과 힘겨움의 이유는, 인간이 가진,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애(自愛)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죄가 원인이기에, 비록,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가 내게 그리하게 하셨듯이, 나도 그에게 안타까움과 긍휼의 고통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상대를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랑과 의를 이루도록 돕는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이다.
여섯번째. 8절, 그렇게 되려면, 그를 위한, 내 모든 의도와, 목적이, 변질되지 않토록, 내 잠재의식까지 청결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의 자아애(自愛)로 인한, 죄의 특성을 아신다. 인간은 죽기전까지는 언제든 변질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말씀하신다. "저이를 위한, 너희 모든 목적과, 의도와, 의식이 변질되지 않토록,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 라고, 훗날, 예수님은 나에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해, 그것을 했느냐, 상대를 위해서냐, 너 자신을 위해서냐, 라고 말이다.. 일곱반째. 9절, 이 모든것을 이룰 때, 그를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어 그를 평안케 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이 모든것이, 그를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어떠한 거짓과, 조건도 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도록 해야한다.. 동시에, 그 사랑의 평안이,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닌, 예수의 것임을 알게하므로, 진짜 사랑이 무엇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며, 긍극적으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하나됨의 평안을, 이루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이다.
여덟번째. 10절, 이렇게 할 때, 바로, 이 모든것으로,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의를 나타내어 보여주므로,, 세상에 사탄의 거짓 사랑을 들어내어,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 의는, 결코 내가 좋고, 내가 만족하고, 내게 이익이 되는.. 타락한 인간인 내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이다. 그 진짜 의를 세상에 나타내어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사탄의 거짓 사랑 곧 자애(自愛)를 들어내어서 그것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하나님의 진짜 사랑과 사탄의 거짓 사랑의 싸움.. 이 싸움은 분명코 내게는 고난이요, 손해요, 핍박이요, 죽음이 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결과는 예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며, 하나님과 같은 온전해짐이며,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영광이며,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 흔히들.. 아니, 사람이면, 누구나 다, 저 조건들을 피하고 벗어나야 복이라 생각한다. 구약 성경에도, 위와 같은 조건들을 결코 복이라 말한 흔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모든것을 온전히 이루고, 통과하고, 거쳐와야, 천국을 소유하게 될 복이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귀결점이, 천국에서 천국으로 이어지고 끝나는, 저 팔복을 다음 구절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 된 방법으로, 이루워야 할 길로써, 확고하게 제시해서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왜 어째서 이러한 것들을 복이라 말씀 하셨을까.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두가지 반드시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첫번째 그것은.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이(makarioi)라는 헬라어 단어이다. 마카리오이(makarioi)는 마카리오스(makarios)의 복수형인데, 마카리오스(makarios)는 마칼(makar)의 연장형이다. 현대어적 뜻은 보통 영어로 시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지만, 헬라어의 뜻으로 보면, 저 단어가 쓰이는 용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받아서 누리는 복'이란 통념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마카리오이(makarioi)라는 저 단어를 단순히 복으로 번역해놨지만, KJV든, NIV든 대부분에 영어 성경들은 "blessed"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blessed"라는 단어의 뜻은 다 알 것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좋은것을 의미하는 'Good', 또는, 'happy'가 아니다. '신성하고', '고귀하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나 혼자 받아 누리는 그져 좋은 복(福)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나 혼자 누리는 것을 신성하고 고귀하다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복은,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회복하고, 닮아가고, 그대로 삶으로 보여주면서 다른 이들도 닮게 하는 복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세상에 전해지듯이 그렇게 복의 전달자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란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이다.. 두번째 그것은,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 부르는, 마태복음 5장에, 저 복의 구절들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서술형이 아닌, 시어적 감탄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복 되어라~! 심령이 가난한이여. 천국이 그대들의 것이니.."..라는 형식이다. 영어성경에도 그대로 같은 형식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문제가 된다. 마태 5장의 복의 구절들이 10절로 끝나는 8복이라면, 헬라어 원문에서도, 11절부터는 서술형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허나, 아래와 같이, 11절 또한 "복 되어라"..로 시작하는 시어적 감탄사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예수로 인해 받는 고난의 복을, 배제해 버리고, 희석해 버리려고, 8복이란 명칭을 붙여놓은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원어성경으로 정확히 말하면, 8복이 아니라 9복이다.. 왜냐하면, 3절부터 10절까지의 저 복의 조건들은, 사탄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며, 예수의 사랑의 방법이며, 의이를 이루는 방법이고, 예수 자신이 그 복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너희의 방법과, 너희의 사랑이 아닌, 내 사랑과 그 방법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라 이 말이다. 그래서..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팔복에 대한, 나의 저러한 해석, 즉, 나 한사람의 개인적인 현재 삶의 상황이나 조건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와, 방법과, 목적으로 보는 것들이, 덧붙임 또는 확대 해석이라, 말 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허나, 5장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자. 인간인 내 입장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이다. 예수님은, 저 여덟개의 복을 말씀하신 후, 5장 13절부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5:13~16)"..라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툭하면, '세상에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들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저 문장에는, 소금과 빛이, 사람됨에 대한 목적이거나, 행위의 동사로 쓰이지 않았다. 즉,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가 아닌, "너희가 곧 그 세상에 그 소금이며, 그 빛이다."라고 하신다.
이것은 '되라'가 아니다. 위에 복의 조건들을 이루고, 소유한 예수의 제자에 존재 자체에 대한 귀정이며, 명명이란 것이다.
또한, 마태 5장 17절~20절로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목적을 말씀하신다.. 여기에 또다시 이어서 마태 5장 45절에, 그 율법의 완성을 위한, 삶의 태도와 방법을 제시하시며, '이와 같이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고, 마태 5장 46절~48절에,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이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이기에 너희도 온전하라' 고 하신다. 자아, 이래서 위에 팔복에 대한, 나의 저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현재 처한 삶의 상황이나, 조건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여덟개의 각 구절의 귀결점이 목적이거나 개인에게 주어지는 복도 아니고,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의 서두와 결론이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저런것들이 복인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과 길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길이며, 바로 이 회복이 진정한 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회복을 이룬 그가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자아, 이제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나는 우선 모두에게 질문부터 하겠다.. "이 세상의 정의, 곧 올바름이란 무엇이며, 불의, 곧 그릇됨이란 무엇인가.".? - 첫째. 내가 손해보면 정의가 아니다. - 둘째, 내가 맞으면 정의가 아니다. - 셋째, 내가 빼앗기면 정의가 아니다. - 넷째, 내가 가난하면 정의가 아니다. - 다섯째, 내가 울면 정의가 아니다. - 여섯째, 내가 주리고 배고프면 정의가 아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정의의 기준이다. 다시 말해, 내게 이익이 되야 그것이 정의다.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 만들어놓은 것이 세상의 법이다. 내게 이익이 안되면 모든것이 불법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내게 이익이 되는 세상의 정의와 법을 준행하고 지켰는데, 왜 어째서 예수님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을까. 마태 5장 10절의 저 '의'이는.. 나를 의해, 내게 이익이 되게 만들고 정해놓은 세상의 정의와 규정적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11절을 보자.. [한글 킹제임스 성경, 마태 5장 11절..]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꾸며, 갖은 악한 말로, 너희를 거슬러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 '의'이는 단순히 공평이나 평등을 말하는 '의'이거나. 무저항/비폭력을 말하는 '의'이가 아니다. 저 '의'이는 하나님, 곧 예수님의 사랑의 '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왼뺨을 돌려대라 했다해서 무저항과 비폭력을 들먹인다. 그래서 악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똑같이 주신다 했다해서 수량적 공평과 평등의 의를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확히 무저항과 비폭력, 또 수량적 공평과 평등이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주고, 십리를 같이 걷고, 원수를 사랑하는 이것은 각 개인에게 속한 상황과 여건속에서 다른 이들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고, 그를 위한, 사랑을 이루라 하신 것이지, 내가 아닌 다른이가, 그런 불합리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무행동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10절에서 의를 위한 핍박의 복은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수량적 공평이나 평등이 아니다. 상대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것을 그에게 맞게 내어주시는 당사자적 의다. 그 '의'이는 곧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이의 본질이다.. 그 사랑은, 그 의는,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저이를 위한 사랑이며, 저이를 위한 의이다.. 예수의 제자는, 세상에서 오직 저이를 위한, 예수의 사랑과 그 의이로, 세상의 자기 이익을 위해, 만들고 정해놓은, 저어 거짓 정의와 법을 맞써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거짓 의이와 법을 지키다가 받는 핍박이 아닌, 예수의 사랑의 의이를 나타내서, 세상의 그것이 거짓임을 들어내므로 받는 핍박이란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을 위해 선악과를 먹으라 해서, 타락으로 이끈, 사탄의 거짓 사랑과, 거짓 의를 대항해서, 자아애(自愛)가 없는 예수의 사랑으로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이 한국땅에 와서, 사랑과 정의를 외치고 갔다. 그런데, 그 사랑과, 그 정의에는 예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져, 내가 손해보지 않는, 사회 규범적 인간애와, 그것을 위한 정의였을 뿐, 예수의 사랑과, 그 정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없는 사랑, 그리고, 정의는, 허상일 뿐이고,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 형상이신 예수가 사람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코, 자아애(自愛)가 없는, 그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예수만이 자아애(自愛)가 없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태 5장 10절의 '의'이에 대한, 헬라어 단어,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라는 단어의 어원을 알아 보겠다..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는, '정의', '공의', '의'이를 말하는 단어이다. 이이 단어의 어원은, '흠 없음'이란 뜻과, '거룩함'이란 뜻을 가진, 디카이오스(divkaio")란 단어인데, 다시 이 디카이오스의 어원은, '심판'이란 뜻과, '처벌'이란 뜻을 가진, 디케(divkh)라는 단어가 어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디케'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이 어원은, '보이다'와, '보여주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인 데이크뉘오(deiknuvw)라는 단어이다. 자아, 저 단어들의 뜻을 집약해 보자.. '의'는 '흠'없고, '거룩'함으로 '심판' 앞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집약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의 그 사랑과, 예수의 그 의이는, 세상에 나타내어 보여주므로, 사탄의 그 거짓 사랑과, 그 의이를 들어내어, 심판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자아애(自愛)가 없는, 저이를 위한, 진짜 사랑과, 진짜 의를,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분명코, 그로 인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나와 당신이, 예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 뷴의 보좌에 함께 앉는..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존재가 되는..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 예수의 그 사랑으로만, 우리 서로 사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