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들이,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오인하도록 잘못 가르치고, 전하고,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오류가 아가페란 헬라어에 설명이다..
엄격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에 이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또 예수께서 이끄시는 마음을 잠재우면 안되기에, 쓸수 있는 데까지 쓰려 한다..
엄격히 따지면, 아가페는 하나님이신 예수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여섯가지 사랑중에, 사람들에게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학적 용어이다..
이 단어를 최초로 성경에 가져와 쓴 사람들은 사도들이다.. 이유는, 자신이 경험하고 성령으로 깨닫고 있는 하나님(예수)의 그 사랑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근접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가페가 예수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 어휘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란 단어로 예수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제 올린 글에 아래에 추가하면서 언급했듯이 나는 아가페란 단어로 예수의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아가페란 단어를 쓰게될 경우,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오류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개념과 혼동을 줄 수 있어서 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사랑" 이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이 아가페에 대한 설명중에 오인하도록 잘못 가르치는 부분은 이것이다. "아가페는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고, 무조건적 사랑이며,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이다." 이런식으로 가르친다. 예수의 사랑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못하면서 마치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이란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여기서 한번 요한복음 13장 34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겠다.
역본 : Byzantine Majority (비잔틴 맛소라)..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διδωμ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ινα και υπειΣ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헬라어 성경이라고 해도. 필사본을 어떤 것으로 참조하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겠지만, 필사 연대기로 원문에 제일 가까운, 위에, 비잔틴 사본을 보더라도 아가페라는 단어가 세번 나온다. 아가파테(αγαπατε) 뿐 아니라, 에가파사(ηγαπησα)라는 단어도 아가파오의 파생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문맥으로 보면, 사람 속에서 나온, 자애(自愛)가 목적인, 사람의 의지로 인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의 그 사랑, 곧 내가 너희를 아가페 하듯이 너희도 나의 아가페로 서로 아가페 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표현데로, 나의 사랑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들은 바로 이것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서 아가페라는 단어를 빌려와 썼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가르치지도 않고, "아가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주시는 사랑" 이라고 설교를 하니 무엇을 배우겠는가,
어떤 무지한 이들은, 아래의 구절들을 들어가며 이런 말까지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필레오, 스트로게, 에로스, 아가페라는 단어의 구분 없이 아무 단어로나 사랑을 말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전체적 문맥을 보지않고 한구절만 보고 말한다는 것이고, 단어의 여러가지 뜻이 있다는걸 염두에 두지않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래 그런 말을 하며 그들이 내세우는 구절들을 보자.. 가로안에 든 설명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적은 것이다.
첫번째.. 요한복음 5장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필레오.. 동등한 관계)..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설명 1.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자기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버리신 하나님이시다. 친구라는 관계는 동등한 사람끼리의 관계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란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저 필레오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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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요한복음 16장 27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필레오,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친구),,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필레오.., 나와 동등된 친구)..
설명 2, 필레오의 뜻 중에 지식과 이해란 뜻이 있다. 이 말은 첫번째 예수를 지식적으로 알고 이해 하게 됐기에 사랑하게 됐다는 말이고, 두번째 필레오는, 하나님 자신과 동등된 나를 사랑하시듯 너희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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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요한복음 20장 2절..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필레오.. 다정하게 아끼는 친구)..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설명 3. 이 구절은, 그 다른 제자... 즉, 사도요한 자신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의 필레오는 친구처럼 다정히 사랑하시던 제자.. 이런 표현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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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가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다.존중하다)
설명 4. 아가페 또한 그 속에 든 단어적 뜻이 다양하다. 이 구절에서의 아가페는 존중과 귀중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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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요한일서 2장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아가페..숭배적),,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가페.. ..숭배적).. 아버지의 사랑이..(아가페.. 은혜와 희생)..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설명 5. 이 구절에서의 2번째까지의 아가페는, 세상을 아가페 한다란 절대시 하고 숭배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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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디모데후서 4장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아가페 ..숭배적)...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설명6. 이 구절도 다섯번째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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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는 철학적 의미의 단어이다. 헬라철학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의 동기와 목적은 에로스.. 즉, 자 애 로 귀결 된다. 아가페도 그 단어가 쓰이는 용도와 문맥과 사람의 의식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뜻과는 완전히 다른 뜻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또한 명심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가페는 하나님만 할 수 있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랑이 아니다. 타락 이전의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은 온전한 사랑이었다. 그 타락으로 인해 그 사랑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사탄의 거짓 사랑,, 자애(自愛)로, 속성과, 본능이 되어 버렸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창조주이신 참사랑이신 예수께서 우리안에 말씀과 성령으로 함께 계시면, 예수께서 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의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다. 개념적, 의식적으로는 비슷하고, 가장 근접해 보일 수 있지만, 깊게 들여다 보면, 예수의 그 사랑을 설명하는 단어로써는 분명히 부족하고 적합한 단어가 아니란 사실을 성경을 깊게 읽어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가페란 단어는 무자애(無自愛)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가페란 단어는 불교의 해탈이란 단어와 어울린다고 본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자애적 속성으로 아가페를 할 경우,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또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유희하고 즐기며 자기 만족을 위한 도덕적 향낙 주의자에 형태를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가페의 특징중에 하나가 무조건이란 개념이다. 얼핏보면 예수의 사랑과 가장 잘 부합되는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가페의 무조건이란 개념은 불교의 해탈을 위한 무소유란 개념과 상통 될 수 있는 개념이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 무조건 주고, 소유하지 않으려는 의식..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하는 사랑은 아니란 것이다.
세상의 화평은 늘 조건이 붙는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국가간의 각종 조약도, 사회적 규범도, 개인간의 약속도 바로 이 조건이 깔리고 실행 될 때, 화평이란 말이 성립이 된다.
그리고 그런것들을 통해 인간의 오감을 충족시켜 줄 때, 그것을 인간애라고 한다.
그런데, 국가간의 평화조약을 맺어놓고서 시시때때로 서로를 감시 한다. 그런데, 사회 규범은 만들어놓고, 저 사람이 먼저 지켜야 내가 지키려 한다. 그런데, 개인간의 약속은 해놓고 그 약속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과 압박으로 짐스러 한다. 과연 저런것이 저이를 위해 저이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일까.. 또한 과연 저런것이 진짜 화평일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않다.".라고, 예수의 화평은 그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다만, 예수의 사랑의 화평은 나를 화평의 사람으로 회복하시고 창조하신다.
그래서 또다른 사랑을.. 그리고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그것이 산상수훈과 팔복의 뜻이며,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위에, 내 말을 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드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관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이 무조건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조건적일 수 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를.. 또 그 분의 사랑의 진정한 속성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묻지않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사랑에 조건이 붙는다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자기를 위한 계산과 의도와 조건을 깔아놓고 하는 사랑이기에 그렇다. 어떤 은사주의자 목사는 이것이 인간애게 주어진 인간의 사랑이라 하면서 인간의 근본적 본능이란 식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 한다.
허나, 자애(自愛).. 그것은 곧. 사탄의 거짓 사랑이다.. 인간에겐 없던것을 사탄이 심어놓은 가라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어째서 하나님의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가. 또 그 사랑의 동기와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계산도, 그 어떤 의도도 없는, 오로지 상대를 위한 사랑.. 자애(自愛)가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을 닮은 타락 이전에 우리의 형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조건'을 말하면서, 왜 '무조건'의 이유는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려 하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를 믿고, 현재, 내 삶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겉으로 나타난 죄의 조목들은, 잘못이라 여기고. 그런 것들은 회개는 하면서도, 그 죄가, 자애가 원인이 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다 이거다. 자기를 위한, 사탄의 그 거짓 사랑만큼은 고수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서이고, 그것도 사랑이다.라고 합리화 하고, 자기의 죄의 근원을 부인하려는 그 의식이 있어서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면서도, 그 분의 진정한 사랑의 속성을 말하면, 인간의 거짓 사랑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자애(無自愛)"의 사랑이라고, 말을 못하고, 아니, 안하고, 무조건, "무조건"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책임이 무마되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말하는 사랑은, 결코 세상이 다 하는, 자아애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 바로, 그 무자애의 예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또한, 우리도 그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하나님과 다른이들에게 드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 분의 형상, 즉, 그 사랑을 닮은 또다른 사랑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와 같아져 주셨듯이.. 나도, 그 분과 같아져 드려야 한다..
바로 이 관점으로.. 예수의 온전한 그 사랑으로..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의 죄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를 따르고 섬기는 이의 가치관이요 인생관이란 것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러개 중에 하나인 기준도 잣대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에 의해 그 형상으로 똑같이 창조된 인간의 진짜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허나 명심하라. 예수의 사랑에는 딱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는 사실.. 그 조건이 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했기에 너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너를 이 세상에 존재케한 이유다." 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진짜 사랑이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참 자유가 있다.
왜냐하면, 자애가 없는 그 사랑은 내가 아닌 예수가 자기의 그 사랑으로 나와 당신, 우리에게 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진짜 사랑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상대에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게 하는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바로 이것이.. 예수 사랑의 완성이며, 우리 존재의 완성, 구원의 완성이다..
이래서 나는 아가페든, 필레오든, 사랑을 이 단어들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의 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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