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 방언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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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 방언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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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9 09:15:35
 
 
나는 작년에 쓴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라는 글에서 잠깐 바벨탑 사건에 대해 언급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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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나와 같은 것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같은 것을 사랑하려 든다면 그것이 곧 자기애(自愛)다.
사랑은 동질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질성이다.. 다만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와 같은 동질성이 되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과 같아져 주신 것, 바로 그 것이다..
흔히들.. 동질성 회복, 동질성 회복, 그게 좋은것이냥 그러지만, 그 의식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와 보호를 위한 타락한 인간의 自愛적 본성에서 나온 말이란 것이다.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성경에 바벨탑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신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그런데 바벨탑을 세우려던 사람들은 정 반대로
정복도 개간도 확장도 아닌 현실안주와 자기 안정만을 위해서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원하셨고, 그 다양성과 변화를 통해 나와 다른 것을 서로 받아주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화합과 하나됨을 이루려 애쓰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원하셨다.
그것이 창조주를 닮은 인간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언어의 달라짐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인간의 발전을 위한 은혜와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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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은사주의자들에겐 또다시 나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글이 될지 모르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기에 내게 허락하신 예수의 사랑을 기준으로
신구약 성경을 비교하면서 쓰려한다..
 
나는 이 글의 부제를 "우리는 이미 방언을 하고 있다" 라고 정하고 싶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받은 첫 증거로 방언을 들먹인다..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것이다.. 라고 하면서 방언을 강요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고백이란 것이다..
 
시 51:11 주의 임재로부터 나를 내어쫓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
 
다윗이 방언을 했는가?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방언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안에 성령이 계심을 인식했고, 자기의 죄로 인해 성령을 거두지 마시라는 간청을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전 구절이다..
 
51:10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구절은, 성령이 임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무엇임을 알게 해주는 단적인 고백이다.
그것은 결코 외적으로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인 어떤 물리적 현상을 말하는게 아니란 것이다
성령을 받는 사람은 내속에 깨끗한 마음이 창조되어지고, 정직하고 바른 영으로 새로워진다.
아니 최소한 내 안에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려 애를 쓴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내적인 변화는 채험조차 못하고 있으면서, 방언이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해서
성령을 받았고, 변화가 됐고, 새롭게 됐다고 한다면? 참으로 잘못된 의식 아닌가.?
카톨릭의 신비주의를 그토록 배척하고 이단이라 말하던 교회들이 이젠 그것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성령의 물리적 역사나 그 은사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됐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성령을 무슨 예수 믿으면 부록처럼 주어지는 보너스로 여기고,
그 분의 역사를 방언이라는 틀 속에 가둬놓고 신비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회질화 시키고 제한해 버리려는
은사주위자들의 그 태도이다.
 
그들이 성령 받았다는 증거가 방언이라고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구절은 사도행전 19장 6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18장 18절부터 봐야 하는데 단 한구절만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방언으로 제한해 버리는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는 예수님의 성령에 대한 설명에도 배치되는 행위인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셔서 첫번째 하시는 일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 15:26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면 그가 나에 관하여 증거하시리라.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시작도 끝도 오직 예수에 대해 알게 하시고, 예수에 대해 증거하시고,
또한 예수의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그것을 증거케 하시는 일이다.
결코 방언 자체가 성령이 주시는 보편적 은사도 아니고 주 목적이 아니란 것이다.
 
또한 성령은 결코 자기의 것을 증거하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의 것을 가지고 그분을 증거 하신다.
 
요 16:14 그 분이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 분이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이라.
요 16: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모두 내 것이라. 그러므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릴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노라.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 18장 18절 ~ 19장 10절까지에 말씀을 보자..
18장 23~24절을 보면, 에베소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아볼로에 의해서 세례요한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즉,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에베소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전한 예수의 그림자만을 알았을 뿐.
예수를 알고 믿은게 아니란 사실이다.
따라서 19장 2절에서 바울이 말한 "너희가 믿을 때"라고 한 그 믿음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고 봐야 옳다.
 
사도바울의 방언에 대한 생각을 직시해서 볼 수 있는 구절들이 들어있는 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 다음장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절은, 방언에 대해 말하기 전에 13장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1절이다.
나는 이것을 현대어 성경으로 적어놓겠다.
 
고전 14:1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재능,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고전 14:2 만일 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방언은 성령의 능력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방언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4:4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기를 성장시킬 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 전체가 거룩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고전 14:5 나는 여러분이 모두 방언을 하는 은사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설교하고 예언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방언을 한 후에 그 내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4:7 방언을 말하기 보다는 알기 쉬운 우리말로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은 피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를 놓고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 그 음이 분명치 않으면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전 14:13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 자기가 말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은사도 받도록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후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양쪽을 다 하겠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방언으로 찬미하고 보통 말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고전 14:16 만일 여러분이 방언으로만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당신과 함께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여러분이 감사드릴 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함께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고전 14:18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방언을 하는 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기 위해 주신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아직 구원이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온 교회가 방언하는 것을 듣게 되면 여러분을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고전 14:24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모두 예언을 한다면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이나 새로운 신자들도 그 설교를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양심에 찔려
고전 14:25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털어놓은 뒤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배드리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고전 14:26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내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어떤 사람은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방언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와야 하고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데 유익해야만 합니다.
고전 14:27 방언은 두세 사람만이 모여서 하되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하고 다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통역해야 합니다.
고전 14:28 만일 통역할 사람이 그자리에 없을 때는 소리 내어 방언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십시오.
고전 14:39 그러므로 내 믿음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설교할 수 있는 예언자가 되도록 간절히 원하십시오. 그리고 방언을 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

1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최고 목적으로 삼으라고 하면서,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겠다고 한 12장 끝 부분과 같은 맥락에 말을 하고 있다.
12장 31절은 은사보다 더 중요한것이 무엇임을 알려주겠다 말해놓고 13장에서 사랑을 말한 후에,
14장에선 바로 그 사랑안에서 그것을 이룰 수 있고 사랑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방언도 예언도 오직 예수의 사랑안에 있어야 제대로 된 능력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을 번갈아 말하면서 그것을 행해서 유익을 얻는 대상의 기준점을 하나님께도 자기에게도
두지 않고 반복해서 타인의 유익만을 말 한다.
아래 구절을 주목하라.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기 위해 주신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구절을 사도행전 19장과 연결해 보자. 이미 말했듯이 19장 2절은 예수 믿는 그 믿음을 말한게 아니다.
지금 저 상황속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상황속에 있다.
자, 그렇다면, 아볼로를 통해 세례요한의 지식적인 가르침만 받아왔던 사람들에게 말뿐인 같은 지식적인 증거로는
예수의 존재를 알게 해줄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고전 14장 22절과 같은 의미로 방언이란 표징으로 예수를 모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시작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아니라.. 예수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를 알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결코 모든 은사는 각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거나 회질적인게 아니고 다 다르다고,
 
고전 14:26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내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어떤 사람은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방언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와야 하고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데 유익해야만 합니다.
고전 14:27 방언은 두세 사람만이 모여서 하되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하고 다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통역해야 합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다.
예수가 사람의 성향과 성품과 의식과 생각을 무시하셨는가.? 아니란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사랑으로 각 개인의 성향에 맞춰주시면서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방법과 은사로 역사하시고 자기 뜻을 이루신다.
회질화된 방법으로는 결코 하시지 않는다 이 말이다.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다.? 아니 절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는 시작도 못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자기에게 돈 잘 쓰고 잘해주는 교인을 위한 기도는 구구절절 사돈의 팔촌까지 들먹이며 해주고,
돈 잘 못 쓰고, 자기에게 잘 못하는 교인을 위한 기도는 방언으로 몇마디 하다 끝낸다.
자~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인가.? 방언이 은사라면 그 은사를 악용하는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것이 과연 성령 받은 증거인 방언을 하는 자의 변화되고 새롭게 된 모습인가.?
그 사람은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바로 이것이 은사주의자들의 단적인 모습이다..
 
작년에 쓴 바벨탑에 대해 언급한 내 글을 읽은 어떤 이가.. 며칠전 글 쓰는데 참고하라는 뜻으로 보내준 글에서
저 내 글을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얻었다.
그것은 창세기 11장, 즉 바벨탑 사건에서 언급한 "사람의 말(언어)"이란 단어의 히브리 원어성경의 단어의 뜻과,
신약에서 말하는 "방언"이란 단어의 헬라어 원어성경의 단어의 뜻이 같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부제를 위와 같이 정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방언을 하고 있다" 라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사랑으로 본 내 개인적인 해석일 수 있고 생각일 수 있지만,
현재 지구상에 어느 종족도 인간이 창조될 당시부터 바벨탑사건 이전까지 쓰던 인간의 본레의 언어로 말하는
종족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즉, 지금 우리는 본레의 사람의 말이 아닌 모두 방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말을 다르게 흩어 놓으셨을까.?
작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저주나 벌이 아니다.
나는 몇번을 반복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는 사랑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다. 수 많은 언어가 생겨지게 하신 이유도,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것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사용하시고 계시단 것을 나는 깨닫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해서 하나님과는 완전히 다른 이질성을 소유하게 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그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예수의 구원이 무엇임을 알게 하시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나와는 상관없게 된 너희를.. 나와는 다르게 되어버린 너희를.. 이렇게 내가 사랑할 것이다."..
이 뜻과 의미로 말이다..
 
13:1 나 비록 지금까지 배운 일 없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또 하늘과 땅의 모든 언어를 다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 나는 시끄러운 꽹과리, 울리는 징일 뿐
13:2 나 비록 예언하는 은사를 받아서 장래에 일어난 일을 모두 다 알고 모든 일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나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13:3 나 비록 가진 것 모두 다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현대어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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