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 영접하는 자..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얘기... 우리는 이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6명의 남자를 거처 온 여자를 부도덕한 여자로 인식하여 초점을 여기에 두고 해석하려고 듭니다. 허나 요한복음 8장에 음행을 하다가 잡혀온 여자 얘기에서 보시듯 간음을 한 사람은 돌로 처서 죽여야 하는 게 율법이고, 이스라엘의 통념적 관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수가성 여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부도덕한 여자가 맞는다면, 이 여자도 맞아 죽어야 했다는 논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경 여러 곳에 비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의 선함을 말씀하신 부분들을 놓고 생각해보면, 결코 저 여자를 부도덕한 여자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남편 다섯이란 말로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에 문화적 상황과 관습을 생각하지 않는 판단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습 중에 형제중 하나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못 낳고 죽으면,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이 된 여자를 위해, 아이를 갖게 해서 죽은 자기 형제의 대를 잇 도록하는 관습이 있었고,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사회에서 여자들이 일차로 해야 하는 일은 한집안을 번성케 하려면 아이들을 나아야 하는데, 만약 이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면 과연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냐는 겁니다. 이 부분은 종교를 떠나서 모든 민족의 기본적 가치의 틀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고 요셉지파에 속해 있었던 사마리아는 전쟁으로 인해 이방인과 피가 섞여버렸고, 그래서 유대족속에게 따돌림 당하고, 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하며 살았지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더 바라고 긍휼을 힘입으려 애를 쓰며,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을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선민이기에, 깨끗하고 너보다 낫다”고 교만과 자고함에 빠져서 계명 자체를 형식으로만 지키고, 속은 썩을대로 썩었으면서 스스로 높은 채 하는 유대인들의 예배와.. “나눈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간구 한다”고 고백하며, 진정으로 계명을 지키려 애를 썼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영접할 마음을 준비할 수 있는 예배였을까요.? 그 대답은 분명코 후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로 대비되고 상반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이 아닌 말씀만을 듣고 ‘세상의 구주시라’ 고백하고 따랐던 사마리아인들의 고백인 39절~42절과, 말씀이신 예수님 자체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표적과 이적만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의 태도를 볼 수 있는 43절~5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이적과 기사로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시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믿도록 보여주셨지만, 갈릴리, 뱃세다, 가버나움, 여리고, 예루살렘.. 전부가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습니다. 그 이적과 기사들을 눈으로 보고서도 말이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그런 아무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말씀만을 하셨을 뿐인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상에 구주시라고 예수님을 향해 고백을 드립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소원성취나 하려고 교회건물에 나와서 각종 종교행위만을 행하고 있고, 나를 향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시해 버리고, 아니 말씀을 듣는다 해도 문맥은 다 무시하고, 내 입맛에 맞는 구절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 여기고 기다리며 예배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예배의 모습 아닌지요.? 신실한 영은 우리의 마음이고. 진리는 예수님이며 그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으로 예배하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만이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