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랑은, 다른 이들을 위해, 상대와 같이 울어준다..

예슈아의 사랑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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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랑은, 다른 이들을 위해, 상대와 같이 울어준다..
Level 10   조회수 329
2014-06-03 07:50:19


[들어가는 말씀..]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갈라디아서 4장 12절 - 상반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지난 글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5장 3절을 통해, 관점을 달리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무엇임을 묵상했다.

그것은, 심리적 혹은 재정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부정적 상황과 상태의 가난을 의미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것을 내어주는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이며, 동시에,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을 소유케 될 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은 이어서.. 두번째 복 있는 자,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의 복' 을 묵상하려고 한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 이며, 팔복만을 따로 떼어, 그것만 갖고 설명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사실이다..
저 여덟 구절만 따로 떼어 설명할 경우, 그것이 곧, 사탄의 속임수인 자애(自愛)를 위한, 기복주의와, 은사주의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분명코, 팔복 자체만을, 따로 떼어,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런 복 있는 자가 되는 방법과, 길을, 다음 구절들과, 산상수훈 전체에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팔복은, 산상수훈의 서론, 곧, '이러한 복 있는자가 되려면', 바로, 이런 뜻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며,
또, 더 중요한 관점은,
마태 5장 13절부터, 계속 이어지는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팔복에서 제시된, 조건 사안들과 각각 연결되는 구절들이란 것을 알 수 있기에,
팔복에서 제시된 조건 사안들은, 현재 한사람의 개인이 처한 상황을 의미 하기 보다는, 이러한 조건들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 지라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또 하나, 산상수훈은, 하나님께 어찌하라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나고 대해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하라는, 사람을 위한, 사람수훈이다.
 
내 글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고 있기에, 기존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길 바란다..
지금.. 내가 고백하는 것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먼저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내 잘못은 아니다 하더라도, 나 또한, 사람들과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기에, 그 해결을 위한, 지혜와 죽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구절은, 한 개인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그가 느끼고 소유하고 있는, 슬픔이라 생각하고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해설판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은 다른 의미의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 15절.."
로마서의 이 구절로,
마태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을, 다시 바라 본다면, 어떤 해석이 나올수 있을까..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부분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전제로 말씀하신후, 곧바로 율법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로마서의 저 구절을, 성령이 바울에게 깨닫게하신 말씀으로,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마태 5장 4절의 해석은 달라져야 한다..
즉, 마태 5장 4절은, 내 처지가 슬퍼서 애통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2장 15절 그대로,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 내 몸에 일부로, 같이 동참하는 자가, 되어 주라는 뜻으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과 계명, 곧, 사랑하는 방법의 한 부분이란 것이며,
또한,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가 소유한 슬픔에 함께 하시므로, 위로하실 것이다. 이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다르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한 부분인, 주기도에서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주기도도 산상수훈에서 따로 떼려한다. 하지만, 분명 주기도도 산상수훈의 한 부분이기에, 따로 떼어선 안된다.

[마태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분명히 이 구절은, 로마서의 저 구절과는, 다른 의미로 보인다. 허나.
내가 만나고 대하는, 상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라보면, 같은 맥락임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 비통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의 그 슬픔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해, 준비한 다른 이들을 위한, 위로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1장 3절~7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이것이, 지금 당신과 내게 있는 슬픔의 이유다..
당신의 슬픔이, 누군가에게 위로의 도구가 된다면, 당신의 슬픔, 그것 자체가, 당신에게 위로가 되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장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갈라디아서 4장 12절 - 상반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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