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랑은 상대를 높여주기 위해 나를 낮춰준다..

예슈아의 사랑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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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랑은 상대를 높여주기 위해 나를 낮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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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04:04:09


[들어가는 말씀..]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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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의 계명,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산상수훈 3번째, "온유한 자의 복"을 묵상하려 한다.
 
팔복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인간이 받아서 누리는, 어떤 상황적 물리적 상태와, 소유의 결과만을 말하려 든다.
허나, 저 팔복의 결과를 얻으려면, 전제적 조건사안들이 붙는다는 사실을, 관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러한 상태의 조건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그 모든걸 누리는 복 있는 자가 되리라는 뜻이기에 말이다.

우선,
마태5장5절의 하반절, '땅의 기업(상속)'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왜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 5장5절..' 이 구절 또한 문자 그대로 토지의 소유권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성경적 온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또 헬라어 원문의 단어적 뜻 또한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해석이다.
 
첫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업'이란 의미를 짚어봐야 한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상속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 임자 없는 땅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땅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시란 의미로 보고, 그분의 것을 상속 받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저 땅의 기업이란 말이, 토지의 소유권만을 의미하는 말일까. 여기서 말씀하는 땅의 의미는 무엇일까.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분명히, 이 구절은, 사람이 타락하기 이전에 이르신 말씀이다..
나는, 전부터 창세기의 이 구절에 대해서 글을 쓰려 했다. 오늘은 간략히 언급하겠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고 하신다..
모든 생물.. 즉, 자기 자신도 포함 된, 모든 생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며, 다스림의 뜻 속에는 관리와 보살핌이란 뜻이 내포된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의 이 구절과 마태 5장 5절은, 전혀 상관 없는 구절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땅을 소유한 사람이란 어떤 존재를 의미 하는가.? 땅의 소유권이 있는 사람이다.. 즉 그 땅의 주인이며,
소유한 그 땅의 영역안에서 모든 권리와 힘을 행사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타인이 그 영역안에 살려면 누구나 세금을 물어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 땅을 빌려줘서 소작을 얻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이다..
한마디로, 그 땅을 다스리고 지휘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지도자,
또한, 동시에, 그가 소유한 땅에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이끌어 줄 책임과 권한이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 땅과 그 곳에 사는 이들을 다스리고, 지휘하고, 보살피고, 이끌어 줄 책임과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

언젠가 글에서 나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적이 있다.

"예수님의 성품의 특징은 자애(自愛)가 없는 온유와 겸손이다.
겸손이란, 나는 상대보다 못한 존재란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낮추며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는 것.
온유란, 상대는 나보다 나은 존재란 사실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나보다 상대를 높여주며 섬기며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며 특징이고 자신을 통해 배우라 하신 섬김의 자세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개역판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를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인식하고 온유(溫柔)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온유한 자의 복을 말할 때, 대인관계에서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시각으로 '따듯하고 부드럽게 대하라'는 식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온유(溫柔)라고 번역한 저 말은 단어 선택이 잘못된 오역이다.
 
신구약 성경 원문에서 온유라고 번역한 해당 단어는, 히브리어로 '안와'..이고, 헬라어로 '프라오테스' 와, '프라우데스'..이다.
 
히브리어 '안와'의 뜻과 의미는, '절하다, to bend over', '굴복하다, to bowdown', '노동하다, to labor; to toil',
'겸손해지다 또는 낮아지다 to below , depressed or humble'..라는 뜻이 있고, 또한 착취와 억압을 당한다는 뜻도 있다..

마태 5장 5절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는, 호프, 프라에이스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프로오데스,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이다.
이 단어 또한, 히브리어 '안와' 와 같은 뜻이다.  ‘프라에이스’ 라는 말은 '다스려지는 힘', '조절된 힘', '훈련된 인격'이란 뜻이기에 말이다.

바로 저런 사람이 땅을 상속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태 5장 5절을 원문에 가깝게 저 뜻을 담아 고쳐 쓴다면, 아래처럼 고처써야 한다.
 
"모든 환란을 겪고, 낮아진 사람은, 땅을 상속받을 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저 구절의 원어의 뜻데로 낮아진 사람은, 노예처럼 강제적으로 낮아져 있는 상태의 사람을 의미 하는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낮아진 사람이다. 곧, 예수의 모습을 닮은, 제자됨의 모습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 말이다.

왜 이런 사람에게 땅을 상속받을 자격이 주어지는가.
저런 삶의 고통과, 괴로움과, 곤란을 경험한 사람은, 위로의 사람이 된다. 즉,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장 3절~7절을 참조하자. 사람이 되신 하나님처럼 말이다.

노예처럼 강제적으로 낮아진 사람일 경우, 적대심과 반감의 감정으로 비굴한 삶을 살기에,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자신만을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에겐 결코 지도자로써의 땅의 상속권이 주어질 수 없다..
 
자원으로 스스로 낮아진, 바로, 이런 사람에게, 땅을 상속 받고, 지도자의 책임과, 권한을 얻는 복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할 수 있고, 그들이 땅의 주인을 마음놓고, 온전히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와, 정치와, 사회와, 교육과, 기업에, 저런 사람 한명이 없기에, 저 꼴 아닌가.

한발 더 나아가, 자원으로 스스로 낮아진,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의 성품과, 그의 사랑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며, 창세기에서 사람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땅과 만물을 보살피고, 관리할 그 권한이, 다시 주어진 사람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제시하신, 저 조건사안들은, 바로, 예수의 성품과, 그의 형상으로, 타락이전의 모습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가, 예수의 사랑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이유중에 하나는,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19절~23절에 말한 그대로, 사람의 타락으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받고 있기에, 그 형상을 다시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유와 겸손의 근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을 겸손히 낮춰주셨고, 우리를 자신의 높이까지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이다.. 또한, 이것이 땅을 상속받고, 보살피고,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스스로 낮아진, 온유한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시 깊게, 묵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쉼",  "쉬움",  "가벼움", 이 세 단어의 의미다..
대부분, 저 구절의 의미를, 그져 하나님께 내어 맡기기에, 쉼을 얻고, 쉬우며, 가볍다는 단순한 해석을 말하려 든다..
허나. 우리가 다 아는것처럼, 내어 맡기는 그것이 쉬운 일인가.. 결코, 그것조차 인간인,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는가.
 
나는, 요한복음 14장을 여러번 설명하면서, 12절애, '내가 하는 일'과.. '보다 큰 일' 은, 예수의 사랑이며, 사람의 힘으로 하는게 아니라.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안에서 그 분이 직접 행하신다고 말해 왔다.. 같은 맥락에서 저 구절의, '내 멍에' 도, 우리가 지는게 아니다..
온유의 원어적 뜻을 통해 다시 본다면, 저 멍에는, 예수께서 우리안에서 자기가 지시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쉼을 얻고, 쉽고, 가벼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지금도 그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이며 겸손이다.

[빌립보서 2장 5절~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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