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랑은, 처음 시작, 바로 그 사랑..

예슈아의 사랑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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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랑은, 처음 시작, 바로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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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4 07:42:51

상고 하며, 대조할 말씀..

[KJV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5절..]
(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2)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3)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4)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KJV 성경, 요한일서 1장 1절~3절..]
(1)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
(2)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였으며 너희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었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에게 나타나셨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도 우리와 교제를 갖게 하려는 것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KJV 성경, 요한일서 3장 1절~15절..]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3)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5) 그분이 우리의 죄들을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6) 그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며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이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나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으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함이요, 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
(10)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
(12)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뇨?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13) 나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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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글은, 많이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령이 이끄시는 깊이 그대로 표출해야 하기에, 자세한 설명을 위해, 길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나, 또는, 교양 강좌에 강사의 입을 통해서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모든 인간 관계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기에, 가족을 먼저 사랑하고나서 이웃을 사랑해야 바른 사랑이다.." 라고 말이다..

 
분명히 타당하고, 옳은 말처럼 보인다.. 성경에도 표면적으로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가정과 가족이란 구성원을 만드시고, 서로가 보살피고, 사랑할 것을 율법으로 세워 놓으셨기에 말이다..
허나, 알고 있는가.. 저 사람들의 저 말이, 타락의 속성인 자애(自愛)를 하도록 자극하는 도구로 사탄에게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의 이러한 관점이 어찌 가능한지, 그것을 설명하며, 오늘 본문의 주제를 말하고자 한다.
번역된 성경만을 표면적으로 보고, 위와 같이 가정에 대한 저런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모순으로 여길 것이 사실이다.

[KJV 성경, 누가복음 14장 26절~27절..]
(26)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27)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라오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가정을 만드시고, 서로를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세우셨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풀이하는 이들이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비유로 몰고가서 해석하고, '그럴 정도까지 주만 위해 살라',는 식으로 말하려드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식의 해석은 다음 구절들을 헛개비로 만들어 버리는 짓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음 구절인 28절~32절을, 난해 구절로 치부해서, 해석 자체를 회피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그러나, 이 구절들은, 바로 전 구절들과, 다음 구절인 33절을, 한 문맥으로 봐야 제대로 뜻을 알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

 
28절~32절은, "자기를 부인하는 구체적 방법과 예표를 제시하신 것"이다 이 말이다.
 
즉, 28절~30절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높고 튼튼한 감시탑을 세우려면, 너의 가진 모든것을 다 들여서 세워야 할 것이고,"

 
31절~32절은,
"그렇게 세워놓은 감시탑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적이 처 들어오면, 자기가 가진 병력으로 이길 수 있는지를 타산해볼 것이고, 이길 수 없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 버리고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가오는 적에게 항복해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이 말씀이다.

 
그러고 나서, 33절을 말씀하신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아래 구절이 들어있는, 앞 뒤에 문맥적 뜻과 의미는 다르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KJV 성경, 누가복음 6장 40절..]
제자가 자기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온전한 자는 누구나 자기 선생과 같이 되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와 같이, 그리고 어떤것들을 버리라 하시는가..
그 제자들의 스승인 예수님 자신과 똑같이 다른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이다.

 
그렇다면, 스승이신 예수님은 무엇을 버리셨는가.
 
첫째. 자신의 "진리와, 그 진리이신 하나님" 되심이다.
둘째.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공의" 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이탈하고 타락한 사람을 심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에, 예수님 스스로 이것들을 부인하고 버리지 않으면, 심판만 있을 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를 버리고 사람이 되어 오신 그 분이 예수이시다.

이 두 가지가, 사람이 끝까지 유지하고 지켜갔었어야 했던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이 지켜내지 못했기에, 하나님 스스로 타락의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자기 형상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사셨고, 대신 죽으신 것이다.
너희가 나의 제자라면, 바로 이렇게, 내가 먼저 너희를 위해, 나의 진리의 모든것을 버렸듯이, 너희는 자기를 사랑하는 그 모든 타락의 속성을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이다.
그래야 스승인 나와 같아진 내 제자라고 말이다.
다른 말로, 너희가 나와 같아지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자아, 이제야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이며, 제자됨이 무엇인지 알수 있지 않은가..
이 부분은, "사도요한이 바라본 사랑",이란 글을 통해 이미 설명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14장에 다음 구절들이다.
 
34절~35절..
(34) 소금은 좋은 것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맛을 내리요.
(35) 그렇게 되면 땅에나 퇴비 더미에도 적합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내다 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소금이란 말을, 산상수훈에 그 소금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결코, 이 말씀은 그 구절의 소금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아니, 산상수훈에서 말씀하는 소금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잘못 잡고 있다. 저 뜻은 맛을 내라가 아니다. 소금처럼 죽어지라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34절~35절.. 이 말씀은, 33절의 연장이다. 즉, 한 문맥이라 이 말이다.
이 말씀의 촛점도 33절과 같은, "자기 버림"이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너희가 소금이라면, 소금의 특성인 짠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서야 어찌 너희를 버렸다 하겠느냐. 소금은 짠 맛을 잃어야 사람들이 버리듯이, 너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너희의 모든 자신을 위하는, 타락의 기질과 특성과 속성들을 잃어버려야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위에서 읽었던, 누가복음 14장 26절~27절은, 바로 이 문맥의 서두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혈족 자체를 버리고, 등안시하고, 돌보지 말고, 나만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혈족이라는 자애(自愛)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면, 전에도 말했지만, 인간에게서 타락의 속성인 자애(自愛)가 가장 극명하게 잘 들어나는 것이 '혈족애'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 타락의 속성인 자애(自愛)를 가장 쉽게 자극해서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도구로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것이 '혈족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속성으로 가족이란 개념은, 내 소유라는 가치관의 개념이기에 이런 개념으로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모든 행위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합리화 하고,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이 '혈족애'이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의식은, 누가 사람에게 심어 놨는가.. 거두절미하고 그것은 사탄이다.
인간의 타락의 속성인 자애(自愛)적 의식을, 혈족이라는 가장 그럴듯한 당위성으로 자극해서,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외면하게 만들고,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이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막고, 집단이기주의로 나타내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혈족이란 관계를 통해서 나타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많은 교양강사들과, 어떠한 성경적 비판도 없이, 그들의 말이 마치 진리인듯, 구관조처럼 따라하는 목사들을 통해, "자기를 먼저 사랑하고,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한가지 묻고 싶다. 과연 그런 설교와 그런 강좌를 들어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족 아닌 사람들에게 사랑을 내어주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며, 만약 있다면, 왜 세상은 저 꼴이 되었고, 왜 세상은 믿는이들을 향해서 개독교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가.. 또한 그런 말들을 들어왔던 부모들 중에, 과연 몇이나 자기 자식들에게,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주듯,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줘라",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가..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말이다. "니가 한대 맞으면, 너는 두대 때려주고, 너한테 이익이 되는 친구만 사겨라", 이렇게 가르치는게 사실 아닌가..
 
어떤 이들은 분명 이럴 것이다. "말로 가르치냐, 행동으로 가르치지.."라고 말이다.
그러면, 행동으로 가르쳤는데, 지금 당신들의 열매인 자식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의 행위들은 무엇인가..

"세상이 그런데 어쩌냐"?
세상 탓 하지 말라.. 세상은 나와 당신들 같은 사람 한명 한명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것이 세상이다..
 
그러면, 결국, 자기 사랑, 가족 사랑이라는 것은, 나와, 내 집과, 나의 익권이 오고가는 교회나, 공쩍인 공간에 울타리와 굴례를 벗어나지 못하게하는 원인이 되고 있고, 집단 이기주의로 썩고 있다는 반증이고, 자애(自愛)를 하게 만들어서 지옥으로 끌고가는, 사탄이 처놓은, 거짓의 올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의 저러한 달콤한 거짓말들로 인해, 전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거짓 존재들을 만들어 놨고, 예수를 믿는 가정들이라 하면서, 수 많은 가족 파탄이란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사랑은 시작의 기준과 중심체부터 잘못 된 사랑이고, 비틀어질 수 밖에 없는 시발점을 갖고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그 진리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고, 예수의 상대만을 위한 무자애(無自愛)의 그 사랑으로 걸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된 결과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생관에 문제다. 다시말해, 인간의 혈족 사랑이 먼저가 아니다.

성경적 인생관은, 하나님과 분리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존재라는 의식과 개념으로 바라봐야 서로의 존재를 존중으로 바라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바라보듯,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 대상에게 그릇된 일을 행할 생각조차 하지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시작과 끝으로 기록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성경은 분명코, 사람의 정자와 난자로 생겨난 사람이라해서 가족이라 말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듯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시작되어졌고, 바로 이 개념의 가족을 말씀하고 있고, 또한 그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혈족이란 관계는, 아버지 하나님이 뿌리가 되신 하나에서부터 나온 가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또 너희가 나를 대하고 섬기듯이.. 너희 모두가 서로를 위해 진실로 사랑하고 섬겨라.."

바로 이것이 성경적 인생관이다..
 
다시말해, 누가복음 14장 26절~27절은, 너 자신을 위한 거짓 사랑은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가족 자체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족 자체도 나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웃과 가족은 똑같다. 다만 나와 상대가 이 세상에 보내진 방법과 과정만 다를 뿐이다.

즉, 사랑도, 공의도, 인간의 모든 관계들도, 시작과 뿌리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이며, 그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 분을 통하지 않는 모든 관계의 동기와 의도와 목적은, 또 그에 따르는 결과는 잘못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작과 뿌리를 이탈하고 벗어나게 만들어 버리는 그것이 뭔줄 아는가.
사탄의 거짓말로 타락한 인간에게 심어놓은 가라지인, 타락의 속성인 자애(自愛)이다.
인간의 그 거짓 속성을 더욱 부각 시키고, 자극해서 나만을 생각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 중에 가장 쉽게 이용 당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혈족애 라는 것이다.

 
나의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들은, 내게 이렇게 반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자애도 그 자유 의지에 포함된거 아니냐. 그렇다면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도 타당한거 아니냐",
라고 말이다.

 
만약 저 논리가 맞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먹지말라 한 선악과를, 자기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로 먹었는데, 자유의지에 자애가 포함된 속성이라면, 자신을 위한, 저 행위를,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실수가 없으며, 용인하셨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은 죄다 하시며, 에덴에서 쫓아 내셨다는 사실이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은, 상호 서로를 위한 자발적 의지이여야 한다.
자유의지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요 힘이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란, 오직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제한된 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사람에게만 주셨던 특권인 자유의지를, 자신을 위한 사랑이라는 거짓으로 미혹해서, 사람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을 도말해 버리고, 하나님의 진짜 사랑에서 끊어지게 만든 원인체가 바로 사탄이란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논리로는 자애(自愛)를 자유의지의 일부로 예속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죄가 아니라고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믿음으로 믿는다.
분명히,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과, 우리 하나님 예수께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은,
이 글의 맥락을 통해, 사랑에 속한 '선'과 '공의'에 대한 모든 행위도 결코 나를 위한 동기와 의도와 목적으로 나타난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그 또한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임을 말이다.. 또한,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의 근원적 우상인 자기를 위한 것임을 말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누가복음 6장을 한번 보겠다.

[KJV 성경, 누가복음 6장 32절~35절..]
(32)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너희가 무슨 감사가 있으리요. 죄인들도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느니라.
(33)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잘해 주면 무슨 감사가 있으리요. 죄인들도 그와 같은 일은 하느니라.
(34) 너희가 되돌려 받기를 바라고 빌려주면 무슨 감사가 있으리요.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자 죄인들에게 빌려 주느니라.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들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고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러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리라. 이는 그 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선하심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적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저 말씀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너희가 하나님께 거짓없이 진실하다면, 나를 대하며 섬기듯 하고, 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고르거나,
너를 위해 상대를 타산적으로 대하지 말고, 상대만을 위해서 진실로 하라.
이 말씀이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도, 시각을 달리한 같은 맥락이다.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잘하려는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죄다 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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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지금부터 나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주제를 말하려 한다..
나의 이 글은 내 주장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문맥과 단어적 표현들을 연구했을 때,
그것을 통해, 내가 보게된 관점과 느꼈던 느낌을 말하는 것임을 염두해 두기를 바란다.

 
전에 나는..
레위기 19장과, 마태복음 5장과,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계명들을 비교하며 그것을 통해, 이런 부분을 말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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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레위기 19장, 신약 마태복음 5장, 요한복음 13장.. 이 세곳에 말씀의 기본적 공통점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란 사실이다... 즉, 사람들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란 사실이다... 저 계명들은, 너희를 위해 내가 먼저 지키고 있고, 내가 먼저 행하는,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서 시작되어진 계명이다, 라는 공통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것이 두번째 공통점이다.. 또한 여기서 세번째 공통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계이다.. 이 관계는 결코, 하나님과 '나'와의 1대 1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는, 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관계를 맺고, 그가 다시 하나님께로 유턴해서 그대로 되돌려 드리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맺은 이 관계는 수평으로 다른이들과 계속적으로 맺어가야 하는 관계이다.. 이것이, 저 신구약 세곳에 기록된 계명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다.. 저 19장을 몇번만 읽어보면, 3절에서부터 계속적인 문맥적으로 반복되는 규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규칙은, 사람에게 행하는 부분과, 하나님께 행하는 부분이, 서로 보완하듯 반복적으로 교차 된다는 사실이다..즉, 3절 서두에서 "부모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라"는 명령을 먼저 하신후에, 8절까지,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시고, 제사법을 명하신다.. 그리고 다시 9절부터 22절까지 사람에게 행할 일들을 명하시고, 23절부터 31절까지 하나님 앞에 행할 일들에 대한 명령을 하시고, 32절부터 37절까지 다시 사람에게 행할 일들을 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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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한 주제의 핵심은, "태초, 또는 처음, 또는 시작"이란 단어이다..
먼저,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명령의 반복적 규칙은, 결코 우선순위를 말씀한 것이 아님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왜 저런 반복적 규칙으로 명령을 주셔야 했을까..
 
첫번째 이유는, 인간에게는, 타락의 속성인 거짓 사랑, 곧, 자애(自愛)로 인해 발생한 편집증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로 인해,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 계명 따로, 저 계명 따로, 그렇게 분리해서, 이 계명은 지키고, 저 계명은 외면해 버릴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은 결코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개념의 법이 아니며, 또한 어느쪽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되며, 동시에 하나로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저런 반복되는 규칙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두번째 이유는, 이 사랑의 계명은, 결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목적이다. 왜냐. 세상에 모든 우상의 종교들의 도덕적, 윤리적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내가 뭔가를 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려고 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내가 동기가 아니고, 내가 목적이 아니다. 이 계명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다. 즉,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도덕과 윤리로는 결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 이유는, 이 사랑의 계명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에서 인간의 힘으로만 지켜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저렇게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의 계명을 반복적 교차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의 계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고 끝나야 온전히 다른이들을 위한 진실로 들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반복적 교차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전에 나는, 구약에, 창세기 2장의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출에굽기 20장, 신명기 5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신약에, 요한복음 13장의 예수님의 새계명을 통해, '관계'라는 말을 촛점으로 해서, 분석을 하며 이렇게 언급 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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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에 하나님의 저어 명령은, 성경 전체를 통해,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아주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우리들에게 계속 나타내시고, 이루라 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의 십계명과, 신약의 예수님의 새 계명이다.. 다시말해, 저어 창세기 2장 17절의 야다 라는 단어의 뜻데로, 저어 명령이 관계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 그리고 경험을 포함 한다면,

 
첫째. 창세기 2장 17절에서는, 타락 이전이기에, 너 자신을 위해, 너를 사랑하므로, 너를 경험하지 말라는 뜻을 말씀하셨다는 것이고,
 
둘째. 십계명에서는, 자신을 경험하므로 완전히 타락 되었기에, 자아애로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감안하셔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을 말씀하셨다는 것이고,
 
세째.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는, 위에 두우가지 명령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이, 바로 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을 회복하고, 참 자유를 느끼려면, 타락의 근원과 속성인, 자애에서 나온, 자기 자신을 위한, 관계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이 아닌, 오로지, 상대를 위한, 관계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으로 살아내야 하며, 그것은, 오직, 예수님 자신의 무자애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을..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다시말해, 저어 세가지의 명령들의 공통점은, 다른 무엇도 아닌, 관계라는 것이다.. 결코 나 혼자 무관계로 이루고, 지킬 수 있는게 아니라 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것이다..저어 창세기 2장 17절은, 너를 위한 동기와 방법과 목적의 관계의 거짓 사랑, 곧 자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 됨을 유지하고,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상대를 위한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봐야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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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이 전한 복음서와 서신들에서,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사도요한만이 유일하게 강조하며, 문맥 전채적으로 공통적 서두와 백그라운드로 깔아놓고 썼던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한글 성경에는 전부 다른 표현으로 번역을 해놓은 탓에, 찾아내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헬라어, "알케"라는 단어이다.. 영어 성경들에서는 "beginning"이란 단어로 통일되어 있지만, 한국어 성경들에서는, 태초, 처음, 시작,이란 말로 표현을 달리하고 있다..

 
오늘 상고하고 대조한 말씀인, 요한복음 1장, 요한일서 1장, 요한일서 3장에 번역된 말,
곧, 태초, 처음, 시작, 이라는 표현이, 헬라어 성경에서는 모두 같은 단어인 "알케"이다.
원어에서 말하는 뜻은 분명코 하나인데, 우리 성경은 너무 의역을 한 결과인지,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해놨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알케"라는 단어의 번역이다.

 
사도요한은, 분명히 요한복음 1장과 요한일서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 분의 존재의 시작점을 같은 단어인 "알케"로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요한일서 3장 11절에서, 계명이 주어진 시작점을 말 할 때도 같은 "알케"를 쓰고 있는 점이다.
또 하나, 3장 8절에서 사탄의 타락의 시작점을 말할 때도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알케"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먼저, "알케"라는 단어에 대해서 스트롱코드 사전은 이런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시작, 우두머리, 모퉁이, 첫, 방백, 권세, 기원, 처음",이란 뜻인데,
어원은, "시작하다"를 뜻하는, "알코마이"라는 단어이고, 이 "알코마이"는, 동사인 "처음이 되다, 지배하다, 다스리다, 시작하다,"를 뜻하는 "알코"의 중간태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케라는 단어는 단순한 시간적 의미가 아닌, 존재론적 기원과 위치와 상태를 내포한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요한일서 3장 11절에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 이라고 말 한 부분에서 "처음"이란 말은, 언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누구에게 들려진 말씀일까.
 
어떤 이들은, "처음"이란 말의 시점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 이후, 제자들이 예수 복음을 전했던 그 때,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그 말씀으로 풀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처음"이란 말의 시점을,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이고, 그 때 하신 말씀으로 풀이 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출에굽을 하고난 그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셨던, 그 돌판의 말씀인, 십계명으로 풀이해서 말 하려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기록한 각 서신들에서, 예수의 하나님이심과 계명의 발생 시점을 말 할 때, 전체적 문맥의 밑바탕으로 깔아놓고 말했던 근본적 시점은, 그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창세 때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서두인 태초라는 말뿐 아니라, 11절 다음 구절인 요한일서 3장 12절과, 2장 1절~7절까지다.
그런데, 우선 이 부분과 함께, 반드시 우리가 짚어보고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다.
그것은 3장 7절 부터이다..

[KJV 성경, 요한일서 3장 7절~8절..]
(7)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이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나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으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사도요한은, 7절에서 창세기 3장이 떠오르는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과연, 우리를 속이는 자는 누구인가. 사탄이다.
사탄은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속여 죄를 짓게 만들고 하나님께 떨어져 버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8절에서, 사도요한이 언급한, 예수님께서 멸하시는, "처음"부터 죄를 지은 '마귀의 일'이란 대체 무엇이며, 또 '마귀의 죄'는 무엇일까.

 
흔히, 대부분 은사주의 목회자들은, '마귀의 일'이란, 사람에게 각종 육체적 병과 가난과 고통만을 갖다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귀의 일'이고, 그것이 '마귀의 죄'이고, 예수님께서 멸하시는 '마귀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성경을 너무나도 편협하게 인간의 육체만을 통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하는 말들이다.
 
육체적 병과 가난은,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을 만드시는 과정에 자기의 사랑과 뜻을 나타내는 도구와 방법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저 목사들의 논리데로 인간에게 육체의 병과 가난을 갖다 주는게 죄라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지으셨단 말인가.. 제발 생각좀 하고 말하자.
 
8절을 깊이 되새겨서 다시 읽어보자. 이사야 서에서 천사장이었던 루시퍼의 타락을 뭐라 하는가. 자기를 위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나님의 보좌와 자기의 자리를 견주다가 하늘에서 좇겨난 존재가 타락해서 사탄이 된 루시퍼다.
다시 말해, 사탄이 처음부터 지은 그 죄는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죄다, 이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잘못된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죄에 대한 정의다.. 우리는 여태껏 죄에 대해 말하고 정의할 때, 우리의 육체를 중심으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즉, "살인, 간음, 강도, 절도, 사기,"와 같이, 타인에게 부정적 손해와 피해를 주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들만을 죄와 악으로 여겨오며 정의해 왔고, 그 상황들만 해결하려고 각종 법을 만들고 억제하려 해왔다.
그러나, 저 일들은, 죄의 결과적 부산물들일 뿐이지, 죄의 실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탄의 죄는 육체가 없기에 육체로 지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정의는 무엇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나와 당신들의 가슴속에 있는 양심을 통해, 우리의 죄에 대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소원으로 우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자..

그 죄의 소원은, 누구를 위한 의도며, 누구를 위한 동기며, 누구를 위한 목적인가.
"나"이다. 그 소원은,"나"를 위한 의도며, "나"를 위한 동기며, "나"를 위한 목적이다. 이것이 아니면, 죄와 악은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이다.


다시 말해, 사탄의 죄는, 그리고 우리의 죄의 실체는 그 무엇도 아닌, 자애(自愛)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악과 죄들의 결과적 부산물들이 발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자아애(自愛).. 바로 이것이, 사람들에게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의 일'이고, '마귀의 죄'이다.. 예수님께서 멸하시는 마귀의 일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는 없는 그것이 자애(自愛)이고,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께로 나온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단 한마디로 그것은, 무자애(無自愛)의, 오로지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이다.
마귀의 일인 자애(自愛)의 소원은, 나를 위한 의도와 나를 위한 동기와 나를 위한 목적이지만,
하나님의 일인 무자애(無自愛)의 진짜 사랑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직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삶의 모습으로 나타내며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이나, 전도나 선교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일인 진짜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과 도구들중에 한가지일 뿐이다.
이러한데도, 언제까지, 죄의 실체인 자애(自愛)를, 옹호하며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근본 속성이라 거짓을 말하고 정당화 하고 합리화 하려 하는가.

 
요한일서 3장 8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가 아니다.
헬라어, "알케"라는 단어의 내포된 뜻데로 본다면, 존재론적 발생점을 의미한다.
즉, 모든 죄의 처음 시작이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스스로 생각을 잘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를 가져온건 사탄이지만, 선택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내가 지은 죄를 아무 회개도 없이 무조건 그 책임을 사탄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환경적 여건이나 주변인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켜선 안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 죄의 소원은 우리안에 있기에, 그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책임과 의지는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임 전가가, 아담이 자기를 위해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속에 생겨난 죄의 소원의 첫번째 결과물이다. 또한 이 결과물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유도한 사탄이, 인간에게서 표출되길 원했던 죄들의 시발점이다..

다시 말해, 사탄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지은 죄들을 사탄 자기에게 떠넘기는걸 좋아하고 바라고 있다.. 자기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못하게 되기에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자애(自愛)와, 그로 말미암은 죄악의 일들의 발생점과 시작점은 사탄이다.
허나, 다른 이를 위한, 진짜 진리의 사랑의 시작은, 오로지 하나님이신 예수이시다.

[KJV 성경, 요한일서 3장 9절~12절..]
(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함이요, 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
(10)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
(12)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뇨.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11절에서도 사도요한은, 사람에게 들려진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발생점을 표현하면서 또다시 "알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부분도,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어진 시간적 위치"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발생점과 그것을 발생시킨 주체"가 누구인지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 이 말씀이 주어진, 우리의 우리됨의 가치와 기준을, 바르게 정의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랑은,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진 사랑의 말씀이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렇다면, "처음부터"라는 말은, 대체 어느 때를 가르키고 있는 말인가,이다.
"십계명을 주셨던 그 때"인가.. "예수님이 새계명을 주셨던 그 때"인가.. 아니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그 때"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이 부분을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 문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이고 존재론적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1절에서 사도요한이 언급한 "처음"이라는 말이 가르키는 시점이, 어느 때인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요한일서에서만 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번째,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11절 중반에 '말씀'이란 표현이다.
사도요한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계명"이란 말과 함께 썼다.

그런데, 우리의 번역본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 11절에서는, "처음"부터 들은 '계명', 또는 복음이란 표현이 아니라, 개역판에서는 "소식", KJV에서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성경에서는 commandment가 아닌, 모두 message로 쓰고 있다.
헬라어 성경에서도 분명히 명령을 뜻하는 "엡톨레(entole)"를 쓰지 않고,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아(aggelia)"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저 소식, 또는, 말씀은, 언제 주어졌고, 또 누구에게 들려진 말씀일까..
혹시, 바로 다음 구절인 12절과, 2장 1절~7절에 답이 있지 않을까.


사도요한은 11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말씀(소식)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말하면서 12절에 바로 이어서, 아담의 첫번째 아들인 가인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사도요한은 가인을 언급했을까. 여기서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직전에 가인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을 한번 보겠다.

[KJV 성경, 창세기 4장 3절~7절..]
(3) 시간이 흐른 후에 카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를 가져와서 주께 제물로 드렸고
(4)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
(6)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변하느냐.
(7)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소원)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배할)지니라." 하시니라.
 

"너는 그 죄를 다스릴(지배 할)지니라."..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7절에 "죄"라는 단어가 없다. 즉, 저것은 교리적 의역이다.
저 7절에 원어적 뜻은, "나에게 니가 받아드려지기 원한다면, 너를 위한 소원의 의도로 하려하는 그 소원을 다스려라"..이다.

자애(自愛)가 본능과 속성이 되어져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이를 위한 진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상실했다.
[이것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를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사랑으로 공의와 선을 행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기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공의와 선을 이루시려고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자신만을 위하는 모든 자애(自愛)의 죄가 인간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 말은 자유의지가 상실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애(自愛)를 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생령에서 흙 일 뿐인,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에게는, 참 사랑의 능력이신 하나님이 인간속에 같이 하실 수 없게 되었기에,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다른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죄만이 남게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른이를 위한 참된 의도와 목적의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죄는 인간속에 본능과 속성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인간에게 허락 되어젔던 자유의지의 본레의 목적과는 다르지만, 이제는 그 자유의지로 내 속의 자신을 위하는 소원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 7절에 뜻이다.


아벨 또한, 분명히 가인과 똑같이 자신을 위하는 그 자애(自愛)적 속성이 있었지만, 아벨은 최소한 그 소원을 다스렸기에 하나님이 받아 주셨다는 것이다.
위에서, 전에 쓴 글로 다시 적어놨던데로, 창세기 2장 17절의 뜻과, 4장 7절은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이다.
다시말해, 저 7절 또한, 자신을 위하는 거짓 사랑은 버리고, 다른 이를 위한 진짜 사랑을 하라는 뜻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사도요한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사랑",이라고 말 한 후, 바로 이어서 가인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주신 말씀이라고 말이다.

 
자아, 이제 요한일서 2장으로 가본다.

[KJV 성경, 요한일서 2장 1절~8절..]
(1)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
(3) 만일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 분을 알고 있음을 아는 것이요
(4) "나는 그 분을 아노라." 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니,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해지니, 이로써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음을 아느니라.
(6) 그 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하느니라.
(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가 가졌던 옛 계명이라.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이니라.
(8) 또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이는 그 분과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갔고 이제 참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라.
 

사도요한은,
"우리들의 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화목 제물로 예수가 오셨다",하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서 그 분을 알고 그 분 안에 있다면, 그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 분 안에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 분 안에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하면서, 7절에서 문맥상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가 가졌던 옛 계명이라"고..
 
그 분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 하면서,  새 계명이라 말하지 않고, "내가 쓰는 것은, 새 개명이 아니라, 너희가 갖고 있던 옛 계명"이라고 말이다.

분명히, 이 구절의, '처음부터 너희가 가졌던 옛 계명',이란 표현은, 요한서신 자체가 예수님 승천하신 후, 복음이 전해진지 거의 오륙십년이 지난 이후에 쓴 서신이기에 예수님의 새 계명을 옛 계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언급 했듯이,
사도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 곧 예수의 사랑은, 창세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가인에게, 그리고 십계명으로 이미 우리에게 말씀과 소식과 계명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삶으로 우리를 위해 이루시고, 다시 보여주신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해, 사도요한은, 복음서와 서신들의 서두에서, 단순한 시간적 시작의 의미가 아닌, 존재론적 기원과 위치와 상태를 내포한, "알케"라는 단어로 예수님의 창조주 하나님이심과 그 분에게서 시작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KJV 성경, 요한일서 3장 13절~15절..]
(13) 나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진짜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께로부터 나왔고, 시작 되어졌다.
우리가 해야할 사랑은, 자기를 위한, 세상에 사탄의 그 사랑이 아니다.
오직 다른 이만을 위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그 분의 나라의 그 사랑, 예수의 사랑이다.

우리가 예수의 그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면, 수많은 고통과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의 빛으로.. 사탄의 그것이 거짓이란 사실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고, 도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려고, 태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사탄은 수많은 모양의 자애(自愛)라는 거짓으로 인간을 미혹했고,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다. 예수의 사랑은 바로 사탄의 이 거짓을 들어내는 것이며, 진짜 참된 사랑이 무엇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 신학자이건, 목회자이건, 이 사실을 말해줬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고, 아니 더 정확히, 자기들의 익권 때문에, 알면서 묵고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져, 사랑을.. 그것도 예수의 사랑이 아닌, 자기를 위한 거짓 사랑을.. 믿음을 위한 한 부분으로 치부하려들고, 상급을 위한 도구라고 가르처 오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지난 글로 되풀이 하며, 이미 말했듯이, 예수님은 거짓이 되어진 우리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어, 자기의 진리와 참인 사랑을 죽이셨듯이, 우리는 반대로 거짓인 자애(自愛)를 죽이고 부인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과 같아진 제자로 인정하신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사랑으로 죽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예수의 영광이 되고, 예수는 우리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
예수와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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