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의 성전이지 나의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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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의 성전이지 나의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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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12:03:02

** 우리는 예수의 성전이지 나의 주인이 아니다. **

 

고린도전서 3장 4절~8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고린도전후서의 전체적 맥락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전에 제가 써놨던 글을 수정해서 포함시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린도 전 후서가 씌어진 배경을 들여다보면, 그저 단순히 바울이 고린도 전 후서에서, 사람들의 죄의 목록들과, 반 복음적인 일이라고 언급한 부분들은, 그저 단순한 권면이거나, 교육적 예를 들어서 한 말이거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없는 죄를 가정법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각 지역에 전파한, 예수의 복음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들 중에, 고린도  교회가 가장 큰 이단성을 갖게 되었고 문제아로 전락 됐었기에, 그것에 대한 책망으로, 실제로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었던 죄들과, 사건들을 지적하며 극도로 격분한 상태와 어조로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증거가, 고린도 후서 13장 2절입니다,
(내가 두 번째,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앞서도 말했고, 또 미리 말해 두지만, 이제 떠나 있는 동안, 전에 죄지은 사람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쓰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은 1년6개월을 고린도에 채류하면서, 예수를 전하였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과의 마찰이 계속 일어났고, 막판에는, 바울을 끌어다가, 총독의 법정에 세우게 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는데, 그 일로 인해 바울은, 그 곳을 떠나, 에베소를 거쳐, 자기를 파송했던,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되고, 바로 얼마 안 있어, 고린도에,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바울에게 와서,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전말을 알아보라고, 디도를 통해, 써서 보낸 것이, 고린도 전서이고, 그 이후, 디도가 연락이 늦어지자, 자신이 보낸 편지를, 보고 난 이후에, 진행과정을 알기 위해, 디도를 직접 만나려고, 디도가 거처 오는 길의 맞은편에서 보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렇게 만난 디도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 써서 보낸 것이 고린도 후서입니다.

 

그 사건을, 고린도 후서 11장을 통해, 간략히 짚어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온 후, 고린도 교회에, 자칭 유대인이라 말하는, 거짓 사도가 침투했고, 그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가 아닌, 가짜 예수와, 가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서두에서부터 바울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거짓 사도가 전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가지고 현혹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1장 10절부터 시작됩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 고린도 전서 1장 10절..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모두는, 같은 것을 말하고, 또,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너희 모두는, 같은 것을 말하고) 라고 한 부분인데. 다시 말해, 저어 구절을, 고린도 전 후서의 전체적 맥락으로 헤아려 보면, 사람들의 서로 다른 말로 인해, 분쟁과 다툼이 생겼고, 너희의 마음과 뜻이, 흩어졌다는 의미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같은 말을 하라고 표현한, 저어 같은 말이란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의 말일까요.?

 

저어 말은, 그저 단순히 의견 차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디도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격분한 감정과 표현으로 거짓 사도를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뜻으로 말한 부분을 보면, 단순하게 대화로 오고간 의견 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고, 거짓 사도가 써먹었던 방법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한, 바울의 표현 그대로,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신비적 현상을 통해, 시작되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신비적 현상은, 바로 사건의 전말을 전해듣기 전, 클로에 사람들에게서 전해 듣고 보낸,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 바울이 계속 언급하고 있는, 현재 우리가 흔히들 성령의 임재의 시작이라고 왜곡하고 있는, 방언이라는 신비적 현상을 통해, 그 현혹의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서두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바로, 이것으로, 거짓 사도를 통해, 방언을 받아서, 떠드는 사람들과,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 간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고, 그 방언이 성령의 은사냐 아니냐를 놓고, 심한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 듯이, 사도바울은 우리가 일명 사랑 장으로 부르고 있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방언과 은사들을 말하는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워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모두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저 고린도 전 후서는, 헬라어의 원어로 보면, 바울이 굉장히 격분한 상태에서 욕설도 섞인 표현으로 쓴 내용인데, 그 상태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문채로 13장을 썼겠느냐는 것이지요. 즉, 저어 고린도 전서 13장은, 부드러운 권면장이 아니라, 반어법적인 책망장이란 것이며,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고, 떠벌리는 이들에게, 그것이 성령의 은사라면, 모두 유익할 수 있는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중간에 끼워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13장 1절입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 고린도 전서 13장 1절..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이것이, 우리가 여태, 사랑장이라 여겨온 13장의 서두입니다. 다시 말해, 13장은, 사랑 하라가 아니다.. 방언을 한답시고, 2절~7절까지의, 사랑은, 무엇 무엇이라고, 바울이 언급한 저어 결과들과는 정반대의 죄를 짓는 그들의 죄를 지적한 것이란 말이지요.

 

저는, 1절부터에 다음 구절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바울의 의도를 말해 보려 합니다.

 

너희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 말하며, 그것이 너희들의 믿음의 증거라고 여기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 라며, 무시하고, 너희들의 그 판단으로 그들을 실족케 하고 있다.
참으로 너희가 말하는 그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면, 너희들이 짓고 있는, 그 죄들은 무엇이냐. 너희는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한다 하면서, 오래 참지도 않고, 불친절 하고, 시기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속과 겉이 다르게 함부로 대하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고, 쉽게 분노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를 싫어하고, 상대방을 위해, 참아주지도, 믿지도, 바라지도, 견디지도 않는구나..
또한, 구제를 한다 해도, 너희 자신의 자랑을 위해서 하고, 방언을 한다며, 너희에게 산을 옮길 큰 믿음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구나. 그것이 성령이 주신 것이 맞다면, 너희들은 성령이 주신 그것으로 상대를 위한 사랑을 하므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사랑이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는, 예언도, 방언도, 어린 아이의 일일 뿐이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 앞에, 온전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들의 일은 버려라.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도, 소망도, 다 이루어져 완성을 이루겠지만, 사랑은, 오직 다른 이를 위한 것이며, 그를 위하여, 영원히 이루는 가장 소중한 일이기에, 예수에게까지 이르는 장성한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중간에 넣은 이유입니다. 즉, 저어 13장은 사랑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저들의 죄를, 사랑을 통해, 반어법적으로 지적한 것이라 이 말입니다.
여기서, 거짓 사도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하게 했던, 방언이란 현상이, 그것을 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의식에, 어떤 모양의 열매를 맺게 했고, 나타내게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장~9장을 보면, 근친상간과, 이혼과, 간음과, 음행과,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과, 파당을 짓는 것과, 분열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13장과 고린도 전후서 전체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자, 바로 이러한 격분한 감정과 책망을 목적으로 씌어진 맥락으로 고린도전서 3장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방언이란 신비적 현상이 사람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했을까요.?

그 중에 첫째가, 파당을 짓고 분열을 가져오게 됐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방언이라는 신비적 현상을 경험한 사람 대부분 그 마음에 교만과 자고와 함께 스스로를 높이는 특권의식이 생깁니다.

 

“나는 아무도 못하는 방언을 하기에 특별하게 선택되었고, 천국에까지 가는 증거를 가진 자다. 그래서 그 증거가 내 속에 있기에 아무렇게 살아도 될 것이다.” .. 라는 사고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의식이 생겨서 저지른 일들이 3장~9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죄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특히 은사주의와 번영주의에 물들어 있는 교회들 대부분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방언을 못한다는 이유로 믿음이 없다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심리가 생겼고, 또 어떤 결과를 돌출하게 했을까요.?

자신을 무시하는 그들을 맞대응 하려면 한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에게 속해서 직접 배운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 말을 통해서 “나는 ‘바울/아볼로/베드로’ 심지어 그리스도께 속해서 직접 복음을 듣고 배웠기에 방언은 할 필요 없다.”를 말하기 위해, 저와 같이 파당을 만들어 분열을 일으킨 겁니다. 바로 성령의 은사라고 말했던 그 방언이란 신비적 사건이 원인이 돼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3장에서 방언이나 천사의 말보다 예수의 사랑이 먼저라고 한 겁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게 하셨다.”..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심어놓은 “씨앗”은 어디서 왔고, 내가 뿌린 “물”은 어디서 왔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도, 복음의 생수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씨앗도 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바울은 그 씨앗을 담아 사용하신 광주리였고, 아볼로는 물을 담아 사용하신 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은사라고 떠벌리며, 그 일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고, 내 공로와 내 자랑을 삼은 이들... 그런 사람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가 계셔야 할 성전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주께서 임하셔야 할 하나의 건축물일 뿐이다. 그런데 그 건물이 어떤 재료로 지어졌든 더럽혀진다면, 하나님은 그 건물인 너를 허물어 버리실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신 것은 없는 것들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 분의 임재하심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는 그 분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장 26절~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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