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예슈아의 사랑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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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Level 10   조회수 707
2012-11-01 09:32:54

예수의 사랑안에 있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녕하세요  예수의 작은 친구들의, 요나단 김성진입니다... 듣고계신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글자를 읽어주는 음성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녹음한 음성이며, 본문과, 녹음된 파일의 저작권은, 저어 요나단 김성진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소프트웨어의 특성상, 정확한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소리나는대로 적은 부분도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글 올린 시간, : 2012-11-01, 21:32..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직분과 사명, 그리고 영적능력인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기능이 서로 다른 지체이기에 서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12장 말미에,
[한글, 영문, 킹제임스 성경, 고린도전서 12장31절..
오히려 너희는 최상의 은사들을 열망하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But covet earnestly the best gifts: and yet shew I unto you a more excellent way.

라고 말하며, 그 유명한 13장에서 사랑을 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봐야 할 물음이 있다.
위에 구절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13장을 보고 해석하면, 사랑 또한 모든 은사들 중에 하나로 봐야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 또한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창조 곧 인간의 존재의 목적과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너무 번역본만을 보고,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번역된 표현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려는 것도 문제다.
우리는 흔히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을, 이사야 43장 21절.. 이 한 구절만으로 정의 하려든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으로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사야 43장21절은 우리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할 고백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헤의 한계로는 깨닫지 못할 부분이기에 그것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이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구절을 현대어성경으로 보면 19절부터 이어서 봐야 의미를 알수 있고, 21절 자체도 종전에 성경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구절임을 알 수 있다. 현대어성경은 영문 성경을 가지고 재번역한게 아니고, 히브리어 필사본과, 헬라어어 필사본을 가지고 권위 있는 주석을 통해 풀이해서 번역한 성경이다.

이 현대어성경의 이사야43장21절은,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 목적이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이란 것을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구절을 개역판으로 문맥만으로 보더라도 "내 백성"은 이방인인 우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목해 말씀하심을 알 수 있는데도, 문맥은 다 무시해 버리고, 21절 한 구절로 성경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하려 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43장 자체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기 위한 말씀인데, 즉, 21절은 이스라엘의 존재론적 가치가 무엇이었는데 너희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말씀의 서두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어성경으로 보면, 고전12장31절은 "더욱 큰 은사"란 표현이 아니라,
"이런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은사에 속한것이 아니라, 그 은사들이 있어지는 목적이란 의미로 해석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모든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나와 같은 것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같은 것을 사랑하려 든다면 그것이 곧 자기애(自愛)다.
사랑은 동질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질성이다.. 다만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와 같은 동질성이 되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과 같아져 주신 것, 바로 그 것이다..
흔히들.. 동질성 회복, 동질성 회복, 그게 좋은것이냥 외쳐대지만, 그 의식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와 보호를 위한 타락한 인간의 自愛적 본성에서 나온 말이란 것이다.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성경에 바벨탑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신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그런데 바벨탑을 세우려던 사람들은 정 반대로 정복도 개간도 확장도 아닌, 현실안주와, 자기 안정만을 위해서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으로 살면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원하셨고,
그 다양성과 변화를 통해 나와 다른 것을 서로 받아주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화합과 하나됨을 이루려 애쓰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원하셨다. 그것이 창조주를 닮은 인간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다원주의와 같은 그런 의식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다른 이를 위한 변화와 발전이다.

다시 말해,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언어의 달라짐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인간의 발전을 위한 은혜와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위에서 말한, "사랑은 이질성이다"란 말은, 스믈네살 때, 예수님의 사람되심에 은혜를 묵상중에 깨달은 것이고, 이것과 고전12장의 말씀을 통해 더욱 확립된 말이다...

서로 다른 모든 은사는, 우리로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책임이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해, 고전 13장에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랑이 목적이고, 사랑안에 있을 때, 은사가 은사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런데 모든 은사는, 다른 이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게 하시려고 주신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자이건, 교인이건, 은사를 받았다고 떠벌리는 이들은, 그것을, 하나님과 나와의 1대1에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과 도구로 전락시켜서, 내 이름을 내고, 돈 버는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들을 수없이 보고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은사는, 내게 주어져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내 마음데로 부려먹는 나를 따라 다니는 몬스터 같이 주어지는 것이라 여긴다.
허나, 모든 은사는 내 속에서 예수께서 능력이 되시는 것이다.
다시말해, 내가 내 의지와, 내 힘으로 행해서 나타내도록 주어지는게 아니다 이 말이다.
그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만, 그에 필요한 능력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게 아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권한으로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도구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가 다, 우리의 하나님 예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다..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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